학술논문
조선후기 상주 白玉洞影堂의 운영과 陞院
이용수 111
- 영문명
- The Operation of Baekok-dong Shrine in Sangju and it’s Promotion to Seowon[陞院] in the Late Joseon Dynasty
- 발행기관
-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저자명
- 김순한(Kim, Soon-han)
- 간행물 정보
- 『민족문화논총』민족문화논총 제79집, 243~289쪽, 전체 47쪽
- 주제분류
- 인문학 > 역사학
- 파일형태
- 발행일자
- 2021.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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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본 논문은 16세기에 건립된 방촌(厖村) 황희(1363~1452)의 제향처인 상주 백옥동영당의 건립과 운영 및 승원 과정을 검토하였다. 백옥동영당은 ‘백화당(白華堂)’에서 출발하여 1580년 황희의 5대손 황돈(黃惇, 1510~?)의 주도로 건립한 사우이다. 그러나 영당은 임진왜란기 전소되었고, 1595년(선조 28) 우복 정경세의 제자이자 황희의 7대손인 황뉴(黃紐, 1578~1626)의 주도로 재건되었다. 서원으로 승격 전 영당은 상주 입향조인 황보신(黃保身, 1401~1456)의 후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황보신이 상주로 낙향하면서 자신의 백화당에 황희 영정을 모시고 향사를 지내는 한편, 백화당을 문중 회합 장소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이후 황보신의 후손들이 과거급제 및 사환을 통해 상주 향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이 과정에서 영당은 향내 사족들의 공적 장소로 활용되면서 그 규모도 확장되었다. 18세기 초반에. 상주 근암서원에서 개최한 도회에서 사서(沙西) 전식(全湜, 1563~1642)을 배향하여 승원하자는 공론이 처음으로 취합되었으나 실패하게 된다. 그로부터 12년 후 근암서원 원장 전수장(全守長)의 주도로 2차 발의가 시도되었고, 이어 상주 충렬사 재회(齋會)에서 3차 발의 후 상주 전 사림의 공론이 취합되어 1714년 11월 19일 ‘옥동서원 (玉洞書院)’으로 승원하였다. 옥동서원의 승원은 18세기 초반 집권당의 영남 남인 강경책에 대응할 한 방편으로 백옥동영당의 승원을 두고 상주 향촌 사회의 남인 세력과 향론을 결집했다는 점에서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영문 초록
This study examines the construction and operations of Baekok-dong Shrine, a memorial altar for Hwang hui built in the 16th century, and the promotion process to Seowon. This shrine was originally founded (A.D.1580) under the leadership of Hwang Don(1510~?), the fifth generation of Hwang Hui. The shrine was burned down in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5, and was rebuilt under the leadership of Hwang Neu(1578~1626), a disciple of Jeong Gyeong-se and the seventh generation of Hwang Hui. Prior to its promotion to Okdong seowon, the shrine was operated by descendants of Hwang Bo-sin (1401~1456), the founder of Sangju region. This is because Hwang Bo-sin moved back to Sangju and began the memorial service at the family level, by serving Hwang Hui s portrait to his academy. Afterwards, as the descendants succeeded in independence and gained power, the shrine began to be used as a public place for local families and gradually emerged as a center of local public debate. In the early 18th century, a general meeting held at Geunam Seowon in Sangju, and the public opinion was gathered to promote the shrine to Seowon by serving the memorial tablets of Jeon sik(1563~1642), but this was not achieved. Twelve years later, this issue was raised secondly under the leadership of Jeon Su Jang, director of Geunam Seowon, Subsequently, After the third proposal at an assembly of Chungnyeolsa shrine in Sangju, it finally was promoted to ‘Okdong Seowon’ without a single objection, by serving Jeon sik at the shrine on November 19, 1714. This promotion has symbolic significance in that it brought together the force of Nam party among the local community and led the local opinion.
목차
Ⅰ. 머리말
Ⅱ. 백옥동영당 건립과 운영 양상
Ⅲ. 18세기 서원 승격의 노력과 승원
Ⅳ. 맺음말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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