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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蘆溪 朴仁老 文學의 創作 空間과 遺蹟 關聯 몇 가지 探索

이용수 460

영문명
Considerations Relating to the Relics and Creation Sites of the Literature of Nogye(蘆溪) Park, In-Ro(朴仁老)
발행기관
대동한문학회
저자명
李鍾文(Lee, Jong-Mun)
간행물 정보
『대동한문학』大東漢文學 第29輯, 179~216쪽, 전체 38쪽
주제분류
어문학 > 한국어와문학
파일형태
PDF
발행일자
2008.12.30
7,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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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문의
논문 표지

국문 초록

다 알다시피 蘆溪 朴仁老(1561~1642)에 대해서는 이제 사실상 연구사 검토가 불가능할 정도로 수많은 논저가 발표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계 연구에는 아직도 수정 또는 보완해야 할 점이 적지 않다고 생각되며, 그 가운데는 크든 적든 간에 노계문학의 현장에 대한 관심 소홀이 빚어낸 문제점도 결코 적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 논문은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노계 문학의 현장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오류 혹은 의문의 구체적인 사례 몇 가지를 검토한 것이며, 그 검토 결과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금까지 武人으로서 노계의 마지막 벼슬은 1605년 경에 재직하고 있었던 統舟師로 이해하여 왔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벼슬은 실상 1611~1612년에 재직한 助羅浦 萬戶였으며, 이로써 그의 생애를 武人期와 儒人期로 나눌 때 분수령이 되는 시점을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노계가 근무했던 助羅浦의 위치에 대해서도 학계에서는 한결같이 거제도의 남단에 있는 舊助羅로 이해하여 왔으나 사실은 거제시 玉浦洞의 自然部落으로 그 이름이 아직도 남아 있는 助羅임이 밝혀졌다. 한편 그 동안 학계에서는 대체로 萬戶를 微官末職으로 하찮게 이해하여 왔으나 실상 萬戶는 從四品 벼슬로서 품계만으로 따진다면 郡守와 同級이었다. 더구나 萬戶는 휘하에 엄청난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곡물을 관리하고 있었던 상당한 정도의 실력자였다. 둘째,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太平詞>의 창작 공간을 부산으로 생각해왔고, 2002년 동백섬과 오륙도가 내려다보이는 바닷가에 <태평사> 歌詞碑가 세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태평사>는 左兵使 成允文의 本營에서 지어진 작품이고, 좌병사의 본영은 원래 울산에 위치하고 있다가 丁酉再亂 때는 경주지역으로 옮겨져 있었다. 하지만 <태평사>가 지어지던 1598년 12월에는 7년간에 걸친 전쟁의 종식과 함께 좌병사의 본영이 다시 울산으로 옮겨져 있었다고 생각되며, 따라서 <태평사>가 지어진 곳은 울산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된다. 셋째,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蘆溪의 <小有亭歌>의 창작 시기를 1617년 東萊에서 溫泉浴을 하고 돌아오던 寒岡 鄭逑의 小有亭 방문과 연관시켜 이해하여 왔다. 요컨대 1617년 9월 2일 동래에서 돌아오던 한강이 노계가 살던 마을에 유숙하였으므로 노계가 그를 찾아뵈었을 것이고, 이틀 후 한강을 모시고 소유정에 들렀을 때 이 노래를 지어 불렀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객관적인 근거가 별로 없는 막연한 추측일 뿐만 아니라, 노계가 단 한번밖에 소유정에 들리지 않았고, 그 때가 바로 한강을 모시고 들렀을 때였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전재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상황을 감안해보면 노계는 소유정에 여러 차례 찾아갔을 가능성이 많다. 게다가 만약 한강과 함께 소유정에 들렀다면 <소유정가>에 한강에 대한 최소한의 언급이 있음직 한데 그와 같은 내용이 전혀 없다. 아울러 한강과 함께 소유정에 들렀던 9월 2일의 일정으로 보아, 설사 이날 노계가 한강을 모시고 소유정에 들렀다고 하더라도 <소유정가>를 지을 물리적, 심리적 시간이 있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러므로 <소유정가>의 창작 시기를 한강의 소유정 방문과 관련시켜 이해하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많은 것으로 판단된다.

영문 초록

It is a well known fact that Nogye Park, In-Ro(1561 ∼1642) was a renowned artist who represents the poetry of the Joseon dynasty. Over his career, he left 9 Korean verses including the piece , which was at the center of exceptional literary focus, as well as a substantial number of Chinese poetry, and many sijo(form of Korean verse) including the highly popular , which has been included in school textbooks for a long period of time. As such, from the beginning of Korean literature studies(1930's), Nogye received acute attention from the academic community either in the mainstream or perimeter, and so many studies have been reported that there is practically no room for new studies. However, there are aspects to be revised and supplemented in spite of such facts, of which one deals with the large and small problems incurred by a lack of interest in the site of Nogye‘s literature. Following this line of reasoning, I reviewed specific cases of error related to the process of on site investigation such as the period during which Nogye served as the Manho(萬戶) of Jorapo(助羅浦), the location of Jorapo where Nogye worked, the social status of the Manho of Jorapo, the creation site of , and the time when was created, and came to a conclusion different from those of previous studies. Also, methods for enhancing the cultural status of the areas discussed in this study were proposed, and I plan to conduct specific consultations with the relative municipalities and institutions to implement such plans in the creation sites.

목차

1. 머리말
2. 助羅浦萬戶 關聯
3. <太平詞>의 創作 空間
4. <小有亭歌>의 創作 時期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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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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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鍾文(Lee, Jong-Mun). (2008).蘆溪 朴仁老 文學의 創作 空間과 遺蹟 關聯 몇 가지 探索. 대동한문학, 29 , 179-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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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鍾文(Lee, Jong-Mun). "蘆溪 朴仁老 文學의 創作 空間과 遺蹟 關聯 몇 가지 探索." 대동한문학, 29.(2008): 179-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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