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記錄文에 대한 想像的 接近의 일례 - 장영실 관련 기록을 중심으로
이용수 639
- 영문명
- An Example of an Imaginative Approach toward Documentary Literature ―Centered In the Related Records of Jang Young-Sil―
- 발행기관
-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 저자명
- 金聲振(Kim Sung-Jin)
- 간행물 정보
- 『동양한문학연구』東洋漢文學硏究 第27輯, 5~38쪽, 전체 34쪽
- 주제분류
- 어문학 > 한국어와문학
- 파일형태
- 발행일자
- 2008.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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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본 연구는 기록문을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하는 방법론의 한 실례로써 제시된 것이다. 08’ 하계학술대회의 기획주제 〈18세기를 바라보는 눈:『?齋亂藁』〉에 대한 기조강연을 한 것인데, 논문 형식으로 재구성하였다.
『이재난고』과 같은 사적 기록이든,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공적 기록이든, 기록은 본질적으로 찬술자의 개인적 시각이나 시대상황 때문에 중요한 사실들이 고의로 누락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없는 사실을 꾸며내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실재했을 것이지만 누락되었을 사실을 연구자의 상상력으로 補添해보자는 것이 본 연구의 의도이다.
본 연구에서는 그 상상적 접근의 예로서 장영실 관련 기록을 들어보았다. 『세종실록』에서 장영실의 부친을 굳이 明이 아닌 ‘元의 蘇杭州 사람’이라고 한 이유에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본 연구에서는 明의 건국 이후 은거하고 있던 元 치하의 기술 관료를 조선 조정에서 몰래 빼돌려 데려왔을 가능성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이를 논증하고자 하였다.
『태조실록』에서 화약제조술을 알려준 것으로 기록된 ‘江南에서 온 어떤 상인 한 사람’이 가마절훼사건이 있던 세종 24년에 개수된 『고려사』에서는 ‘元나라 염초공 李元’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 明나라 조정이 江南을 왕래하는 조선측 상인의 ‘교역을 빙자한’ 정탐행위를 문제 삼으면서 예로부터 조선이 ‘무수한 工匠을 매수해왔다’는 사실을 문제 삼았던 것, 세종이 금은 제련술을 익히기 위해 중국인 金璽에게 기생을 아내로 삼게 하면서까지 호의를 베푼 것과 칼 만드는 기술자를 유치하기 위해 왜통사 윤인소를 보내 내이포에서 비렁뱅이 생활을 하고 있던 也馬沙其를 설득해서 귀화시킨 것, 그리고 일본의 소개로 回回人 都老를 귀화시킨 것 등이 앞의 추정을 뒷받침해줄 것으로 보는 주된 단서들이다.
이른바 ‘가마절훼사건’이야말로 연구자의 상상적인 접근이 요구되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당대 최고의 과학기술자가 가마를 견고하게 만들지 못했다는 것도 의아한 일이거니와, 의금부와 사헌부에서 조순생이 개입되었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는데도 세종이 조순생의 죄를 묻지 말라고 명했다는 점도 의아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 사건에 어떤 정치적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이와 관련된 기록들을 살펴보았다. 실록 기록자가 장영실의 부친을 굳이 明이 아닌 ‘元의 蘇杭州人’이라 명시한 점, 중국인 金璽의 ‘자취를 숨길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중국으로 보내야 했던 점, 귀화인인 上護軍 金月下의 아들 金富가 한양에 머물러 살기를 청하자 의정부에 명해서 이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중국 조정에서 소환을 명한다면’이라는 말을 썼던 점, 세종이 왜통사까지 보내 귀화시킨 也馬沙其를 일본측에서 다시 보내달라고 공식 요청한 점, 가마절훼사건이 있기 3년 전에 의정부에서 낸 의견에 따라 귀화인 본인과 그의 친아들은 모두 向化人(=귀화인)으로 일컫기로 결정한 점 등이 그것이다.
본 연구자는 가마절훼사건에 앞서, 조정에서 向化人(=귀화인) 본인과 그 친아들은 향화인이라 일컫는다고 결정함으로써, 妓生의 所生이며 官奴였던 장영실은 ‘元의 蘇杭人’이 아닌 ‘妓女’의 아들이며 따라서 귀화인이 아니라고 할 근거를 만들어놓았던 사실에 특히 주목하였다. 가마절훼사건의 배경이 어떠하든, 세종은 이 사건을 이용해서 장영실의 기술에 허점이 많았다는 것을 대내외에 널리 알림으로써 장영실을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함과 동시에 중국측으로부터의 소환 요청을 사전에 차단하려 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던 것이다. 이것이 곧 상상력으로 장영실 관련 기록을 재조명해본 결과 도출해낸 補添의 핵심적 내용이기도 하다.
『이재난고』과 같은 사적 기록이든,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공적 기록이든, 기록은 본질적으로 찬술자의 개인적 시각이나 시대상황 때문에 중요한 사실들이 고의로 누락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없는 사실을 꾸며내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실재했을 것이지만 누락되었을 사실을 연구자의 상상력으로 補添해보자는 것이 본 연구의 의도이다.
본 연구에서는 그 상상적 접근의 예로서 장영실 관련 기록을 들어보았다. 『세종실록』에서 장영실의 부친을 굳이 明이 아닌 ‘元의 蘇杭州 사람’이라고 한 이유에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본 연구에서는 明의 건국 이후 은거하고 있던 元 치하의 기술 관료를 조선 조정에서 몰래 빼돌려 데려왔을 가능성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이를 논증하고자 하였다.
『태조실록』에서 화약제조술을 알려준 것으로 기록된 ‘江南에서 온 어떤 상인 한 사람’이 가마절훼사건이 있던 세종 24년에 개수된 『고려사』에서는 ‘元나라 염초공 李元’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 明나라 조정이 江南을 왕래하는 조선측 상인의 ‘교역을 빙자한’ 정탐행위를 문제 삼으면서 예로부터 조선이 ‘무수한 工匠을 매수해왔다’는 사실을 문제 삼았던 것, 세종이 금은 제련술을 익히기 위해 중국인 金璽에게 기생을 아내로 삼게 하면서까지 호의를 베푼 것과 칼 만드는 기술자를 유치하기 위해 왜통사 윤인소를 보내 내이포에서 비렁뱅이 생활을 하고 있던 也馬沙其를 설득해서 귀화시킨 것, 그리고 일본의 소개로 回回人 都老를 귀화시킨 것 등이 앞의 추정을 뒷받침해줄 것으로 보는 주된 단서들이다.
이른바 ‘가마절훼사건’이야말로 연구자의 상상적인 접근이 요구되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당대 최고의 과학기술자가 가마를 견고하게 만들지 못했다는 것도 의아한 일이거니와, 의금부와 사헌부에서 조순생이 개입되었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는데도 세종이 조순생의 죄를 묻지 말라고 명했다는 점도 의아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 사건에 어떤 정치적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이와 관련된 기록들을 살펴보았다. 실록 기록자가 장영실의 부친을 굳이 明이 아닌 ‘元의 蘇杭州人’이라 명시한 점, 중국인 金璽의 ‘자취를 숨길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중국으로 보내야 했던 점, 귀화인인 上護軍 金月下의 아들 金富가 한양에 머물러 살기를 청하자 의정부에 명해서 이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중국 조정에서 소환을 명한다면’이라는 말을 썼던 점, 세종이 왜통사까지 보내 귀화시킨 也馬沙其를 일본측에서 다시 보내달라고 공식 요청한 점, 가마절훼사건이 있기 3년 전에 의정부에서 낸 의견에 따라 귀화인 본인과 그의 친아들은 모두 向化人(=귀화인)으로 일컫기로 결정한 점 등이 그것이다.
본 연구자는 가마절훼사건에 앞서, 조정에서 向化人(=귀화인) 본인과 그 친아들은 향화인이라 일컫는다고 결정함으로써, 妓生의 所生이며 官奴였던 장영실은 ‘元의 蘇杭人’이 아닌 ‘妓女’의 아들이며 따라서 귀화인이 아니라고 할 근거를 만들어놓았던 사실에 특히 주목하였다. 가마절훼사건의 배경이 어떠하든, 세종은 이 사건을 이용해서 장영실의 기술에 허점이 많았다는 것을 대내외에 널리 알림으로써 장영실을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함과 동시에 중국측으로부터의 소환 요청을 사전에 차단하려 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던 것이다. 이것이 곧 상상력으로 장영실 관련 기록을 재조명해본 결과 도출해낸 補添의 핵심적 내용이기도 하다.
영문 초록
This study is suggested as an example of how to approach toward documentary literature. It was introduced before as the keynote lecture on the topic of 2008 Summer Research Meeting, “the vision toward the 18th century-Ijenango.”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not to make up unfounded stories but to imaginatively complement the facts which could have been omitted, based on a presupposition that almost all records, whether they are personal documents such as Ijenango or public documents such as the Annals of the Chosun Dynasty, could have a possibility of some important facts being omitted deliberately on account of the recorder"s personal opinion or of the political and social circumstances.
This study takes records about Chang Youngsil as an object of an imaginative approach. There may be some other reasons why Chang"s father was recorded as a person from Sohang-ju of Yuan, not of Ming. Above all, this study is to take a serious view of and demonstrate a possibility that Chosun Dynasty took away an engineering specialist of the Yuan Dynasty who went into retreat escaping from the reign of the Ming Dynasty.
The main clues to support this speculation are found in some following records. The Annals of King Taejo recorded that an merchant from Kangnam informed about the method of manufacturing gunpowder, but he was referred to as Yi Won, a Yuan official in charge of gunpowder in the Annals of Koryo, which was rearranged in the 24th year of King Sejong, when the incident of palanquin breakdown happened. The Ming Dynasty blamed Chosun for her merchants" espionage on the pretext of trade in Kangnam and for her long history of buying a number of artisans. King Sejong showed a goodwill to Kim Sae, a Chinese by sending him even a gisaeng to be his wife in order to acquire the skill of smelting gold and silver. He sent Yun Inso, a Japanese interpreter, to persuade Yamasagi, a beggar in the port of Nae-yi into being naturalized in Chosun to gain over an artisan of making swords. He also naturalized Doro, a Muslim, who Japan introduced to Chosun.
The so-called palanquin breakdown incident is a typical case which requires a researcher"s imaginative approach. It was unusual that the best scientist and engineer did not make a sturdy palanquin and King Sejong ordered not to inquire into the case of Cho Soonsaeng, whose involvement in the incident was suspected and strongly argued by Eugum-bu, the department of Interrogation and Sahun-bu, the department of Inspection.
This study paid attention to some following records based on the presupposition that the incident was involved in some political conspiracy. The Annals of the Chosun Dynasty identified Chang Youngsil"s father as a person from Sohang of Yuan, not of Ming. Chosun had to return Kim Sae as she could not hide his track any longer. Chosun government mentioned the words “If Ming government should order his return,” when Kim Bu asked to stay in Hanyang, whose father was Kim Wolha, a naturalized Sangho-gun in Chosun, whose rank was equivalent to the third high in the government. Japan made an official request that Chosun should return Yamasagi, who King Sejong had sent a Japanese interpreter for his naturalization. Chosun decided that naturalized people and their sons should be called naturalized people in accordance with the opinion suggested by Uejong-bu, the executive department, three years before the incident of palanquin breakdown.
This study takes note of the fact that Chang Youngsil was deliberately referred to as a son of a gisaeng, not as a person from Sohang of Yuan, which meant that he was no longer a naturalized person but an official slave, with the decision that naturalized people and their sons should be called naturalized people before the incident of palanquin breakdown. It is speculated that King Sejong tried to cut off the worldly a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not to make up unfounded stories but to imaginatively complement the facts which could have been omitted, based on a presupposition that almost all records, whether they are personal documents such as Ijenango or public documents such as the Annals of the Chosun Dynasty, could have a possibility of some important facts being omitted deliberately on account of the recorder"s personal opinion or of the political and social circumstances.
This study takes records about Chang Youngsil as an object of an imaginative approach. There may be some other reasons why Chang"s father was recorded as a person from Sohang-ju of Yuan, not of Ming. Above all, this study is to take a serious view of and demonstrate a possibility that Chosun Dynasty took away an engineering specialist of the Yuan Dynasty who went into retreat escaping from the reign of the Ming Dynasty.
The main clues to support this speculation are found in some following records. The Annals of King Taejo recorded that an merchant from Kangnam informed about the method of manufacturing gunpowder, but he was referred to as Yi Won, a Yuan official in charge of gunpowder in the Annals of Koryo, which was rearranged in the 24th year of King Sejong, when the incident of palanquin breakdown happened. The Ming Dynasty blamed Chosun for her merchants" espionage on the pretext of trade in Kangnam and for her long history of buying a number of artisans. King Sejong showed a goodwill to Kim Sae, a Chinese by sending him even a gisaeng to be his wife in order to acquire the skill of smelting gold and silver. He sent Yun Inso, a Japanese interpreter, to persuade Yamasagi, a beggar in the port of Nae-yi into being naturalized in Chosun to gain over an artisan of making swords. He also naturalized Doro, a Muslim, who Japan introduced to Chosun.
The so-called palanquin breakdown incident is a typical case which requires a researcher"s imaginative approach. It was unusual that the best scientist and engineer did not make a sturdy palanquin and King Sejong ordered not to inquire into the case of Cho Soonsaeng, whose involvement in the incident was suspected and strongly argued by Eugum-bu, the department of Interrogation and Sahun-bu, the department of Inspection.
This study paid attention to some following records based on the presupposition that the incident was involved in some political conspiracy. The Annals of the Chosun Dynasty identified Chang Youngsil"s father as a person from Sohang of Yuan, not of Ming. Chosun had to return Kim Sae as she could not hide his track any longer. Chosun government mentioned the words “If Ming government should order his return,” when Kim Bu asked to stay in Hanyang, whose father was Kim Wolha, a naturalized Sangho-gun in Chosun, whose rank was equivalent to the third high in the government. Japan made an official request that Chosun should return Yamasagi, who King Sejong had sent a Japanese interpreter for his naturalization. Chosun decided that naturalized people and their sons should be called naturalized people in accordance with the opinion suggested by Uejong-bu, the executive department, three years before the incident of palanquin breakdown.
This study takes note of the fact that Chang Youngsil was deliberately referred to as a son of a gisaeng, not as a person from Sohang of Yuan, which meant that he was no longer a naturalized person but an official slave, with the decision that naturalized people and their sons should be called naturalized people before the incident of palanquin breakdown. It is speculated that King Sejong tried to cut off the worldly at
목차
국문초록
Ⅰ. 問題의 提起
Ⅱ. 外國匠人誘致記錄과 蔣英實父子
Ⅲ. 安輿折毁事件記錄의 想像的 補添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Ⅰ. 問題의 提起
Ⅱ. 外國匠人誘致記錄과 蔣英實父子
Ⅲ. 安輿折毁事件記錄의 想像的 補添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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