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임진왜란 시기 逸翁 崔希亮의 활동과 기억
이용수 130
- 영문명
- Works and Memories of Ilong Choi Hee-ryang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 발행기관
-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 저자명
- 김강식(Kim, Kang-Sik)
- 간행물 정보
- 『이순신연구논총』제28호, 39~76쪽, 전체 38쪽
- 주제분류
- 인문학 > 역사학
- 파일형태
- 발행일자
- 2017.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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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임진왜란 시기에 전라도 흥양현감으로 이순신의 휘하에서 활동했던 일옹 최희량(崔希亮)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최희량은 1560년(명종 15)에 태어나 1651년(효종 3)에 죽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정유재란 때 많은 활동을 했다. 최희량의 본관은 수성(隋城), 호는 일옹(逸翁)이다. 그는 1592년 (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에는 아버지의 상중(喪中)이어서 전장에 나아가 싸우지 못하였다. 그는 1594년 무과에 급제한 후, 충청수사로 있던 장인 이계정(李繼鄭)을 돕도록 천거되어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정유재란 때에는 흥양현감(興陽縣監)으로 이순신(李舜臣)의 아래에서 12차례 전공을 세웠으며, 적의 군량 800여 석을 탈취했으며, 포로 700여 명을 되돌려 왔다. 이에 이순신의 격찬을 받았지만,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서 지냈다. 병자호란 때는 나이가 많아서 직접 출전하지 못하고, 대신 아들을 보내어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扈從)하게 하였다. 최희량은 전쟁 중에 수군과 육군 지휘부의 갈등 등으로 모함을 받기도 했지만, 임진왜란 종전 이후에 전공을 인정받아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올랐다. 그는 1774년(영조 50)에는 향인들의 청원으로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800년(정조 24)에는 나주 향인들이 지은 忠逸祠에 이순신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1871년(고종 8) 시호가 무숙(武肅)으로 추증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일옹집(逸翁 集)』이 있는데, 시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보물로 지정된 「破倭 報牒」은 임진왜란 시기에 전공에 관한 보고의 내용과 체계, 전투에 대한 전공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알려져 있다.
영문 초록
Choi Hee-ryang(崔希亮) was born in 1560(Myeongjong Year 15) and died in 1651(Hyojoing Year 3) and he was a military officer who was active during the Second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the middle Joseon Period. His family is from Suseong and his pen name was Ilong(逸翁). He was unable to fight during the First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Seonjo Year 25) as he was in the period of mourning. After passing the military service examination in 1594, he was recommended to aid his father-in-law Lee Gye-jeong who was serving as the Naval Commander of Chungcheong Province and was named as an officer. He was praised by Yi Sun Sin as he distinguished himself during the war numerous times under his command as the Commander of Heungyang during the Second Japanese Invasion of Korea but he resigned his post and returned to his hometown once Yi Sun Sin died during the Battle of Noryang. He was unable to enlist during the Qing Invasion of Joseon due to his old age but sent his son to protect King Injo at the Namhansanseong Fortress. In 1604, he was named at the top of the list of distinguished servants during the war. He was posthumously given the title as the Minister of War and he was canonized alongside Yi Sun Sin at the shrine built by the people of Naju in 1800(Jeongjo Year 24). In 1871(Gojong Year 8), he was posthumous title of Musuk(武肅). He has written the『Ilongmunjip(逸翁集)』.
목차
Ⅰ. 머리말
Ⅱ. 일옹 최희량의 생애
Ⅲ. 일옹 최희량의 활동
Ⅳ. 일옹 최희량의 기억과 현창
Ⅴ. 맺음말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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