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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10세기 동북아 국제정세와 契丹의 요동정책

이용수 778

영문명
발행기관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저자명
나영남(羅永男)
간행물 정보
『역사문화연구』제39집, 67~100쪽, 전체 34쪽
주제분류
인문학 > 역사학
파일형태
PDF
발행일자
2011.06.30
6,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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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문의
논문 표지

국문 초록

동북아시아에 있어서 10세기는 변화의 분기점이자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는 출구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의 진원은 무엇보다도 중원세력의 분열을 틈탄 거란의 발흥을 들 수 있으며 이러한 정복왕조의 출현은 동북아시아 정세를 일변시킨다. 과거에는 중원왕조가 주변제국을 압도하던 반면 10세기는 장성이북의 북방민족이 동북아 질서를 주도하는 시대가 된다. 중국의 주도권 상실은 華夷思想을 바탕으로 하는 조공ㆍ책봉체제를 맹약체제로 변질시켰고 주변 제국들도 이러한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이념보다는 각국의 실리를 추구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 속에 동북아 국제정세의 가장 큰 특징은 契丹의 崛起라고 할 수 있는 한편 거란의 요동정책은 東丹의 설립으로 대변할 수 있다. 거란은 요동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해 한순간에 발해를 멸망시켰지만 어떤 형태로 그 지역을 통제할지 망설인다. 발해유민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 요 태조는 일단 국호만 바꾼 채 발해의 연속성을 인정한다. 동란은 외견상 독립국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을 뿐 실질적으로 과도기적 정치체제에 불과했다. 야율아보기는 동란이라는 위성국가를 세워 일단 발해유민들의 저항을 완화시키고 초기 거란의 재정을 충실히 확보하면서 궁극적으로 동군연합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태조 아보기의 이러한 뜻과는 달리 거란 내부의 권력투쟁 및 발해 유민들의 끊임없는 반요투쟁으로 요동지역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기도 전에 동란을 축소하게 된다. 태종이 성급하게 동란을 포기함으로써 동란은 독립국에서 지방행정단위로 편입되었는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요동에 대한 거란의 지배영역은 상당부분 후퇴하였다. 더욱이 발해를 구성하고 있던 성원들과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지 못한 결과가 정안국 건립, 燕頗 및 大延琳의 반항, 생여진의 불만으로 구체화된다. 이러한 반란은 비록 실패했지만 요조의 동북지역에 대한 통치에 심각한 타격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발해고지의 통제력 이완은 훗날 거란을 멸망시키는 一因을 제공하기도 한다. 발해 인들은 요가 멸망하는 날까지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저항을 계속하였고 최후에는 여진이 요에 반항하는 큰 흐름 속으로 합류되어 요 왕조를 약화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동란의 성급한 폐지는 요동지배의 실패를 의미하며 또한 요동의제 민족들을 거란의 구성원으로 포섭하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훗날 발해 인들이 아골타가 금을 건국하고 거란을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공헌하는 결과를 제공하게 된다.

영문 초록

東北亞的十世紀可以說是變化的兩平點, 也可以說是進入新時代的門口。這一時期的根源, 首先列舉趁機分裂中原勢力而契丹的勃興。這些征服王朝的出現, 大大改觀了東北亞的局勢。過去與中原王朝來壓倒周邊諸國相反, 到十世紀, 成爲長城以北的北方民族來主導東北亞秩序的時代。中國的授人以柄, 把以華夷思想爲本的朝貢冊封體制變爲盟約體制。周邊諸國也爲了應對如此的情勢, 追求各國的實利。 在如此的變化裏, 東北亞國際情勢的最大特點可以說是契丹的崛起, 另一方面契丹的遼東政策表現出東丹的建立。爲了鞏固契丹對遼東的支配, 短時間內滅亡渤海, 反而, 猶豫了利用什麽形態來控制那些地區。遼太祖面臨渤海遺民的激烈地抵抗後, 一旦改變渤海國號而認定渤海的連續性。外表上東丹國具備獨立國的形態, 實際上只不過是一個過渡期性的政治體制。耶律阿保機一方面以建立叫做東丹的衛星國家, 緩和爲渤海遺民的抵抗, 另一方面, 確保初期契丹財政, 最後要建設東軍聯合的國家。 但是, 與遼太祖阿保機的意圖不同, 由於契丹內部的權力鬪爭以及渤海遺民的連續不斷的反遼鬥爭, 實現鞏固對遼東地區的支配以前, 東丹國就縮小了。遼太宗由於急躁放棄東丹, 東丹國就從獨立國到編入爲地方行政單位。當如此一系列過程中, 契丹對遼東的支配領域相當後退了。尤其沒有除根和構成渤海的成員們矛盾的後果, 出現了定安國建立, 燕頗和大延琳的反抗以及生女眞的不滿等問題。這些反亂雖然失敗, 但是遼朝對東北地域的統治, 給了深刻的打擊。後日對渤海故地和緩統制力, 提供了契丹滅亡的一個原因。渤海人到遼朝滅亡時, 在到處不斷地繼續抵抗, 最後會合於女眞對遼朝反抗的歷史潮流, 成爲遼朝衰弱的一個重要原因。 歸納而言, 東丹的急躁廢止, 意味著契丹對遼東支配的失敗, 而且如同契丹把遼東諸民族沒有容納爲契丹的成員。這是後日渤海人在阿骨打建金國和滅亡契丹的過程中, 提供了直接或者間接地貢獻的結果。

목차

Ⅰ. 머리말
Ⅱ. 동북아 국제정세와 거란의 발흥
Ⅲ. 거란의 요동정책
Ⅳ. 거란과 동란의 관계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중문초록〉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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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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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남(羅永男). (2011).10세기 동북아 국제정세와 契丹의 요동정책. 역사문화연구, 39 , 6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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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남(羅永男). "10세기 동북아 국제정세와 契丹의 요동정책." 역사문화연구, 39.(2011): 6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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