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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실학의 집대성자로서 정약용의 영토 관련 인식 비판

이용수 11

영문명
Criticism of Jeong Yak-yong’s Perception of Territory
발행기관
한국세계문화사학회
저자명
정태상(Tae-Sang Chung)
간행물 정보
『세계역사와 문화연구』제73집, 89~112쪽, 전체 24쪽
주제분류
인문학 > 역사학
파일형태
PDF
발행일자
2024.12.31
5,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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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문의
논문 표지

국문 초록

정약용은 천주교 신자로서, 배교함으로써 사형을 면하고 유배 기간 중에 많은 저술을 남겨, 실학의 집대성자이자 개혁 사상가로 평가된다. 그러나 『목민심서』에서는 노비제 개혁에 반대하면서, 『경세유표』에서는 찬성하여 일관성 없는 주장을 하였으며, 일본의 침략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내용의 일본론을 두 편이나 썼는데, 탁상공론에 불과하다는 것은 그의 사후 40년경부터 있었던 일본의 침략과 병탄이라는 결과가 이를 증명한다. 또한 『요동론』에서 정약용은 “요동을 수복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며 “무력을 숭상하지 않는 나라로서 요동을 차지하고 있으면 그 해가 크다”고 하였다. 이러한 요동에 대한 정약용의 인식은 그가 쓴 『아방강역고』에서 구체화된 것으로 보인다. 발해 멸망 후 세자 대광현이 수만호를 이끌고 고려로 귀부해 왔다는 것은 정사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약용은 대광현이 발해 세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견을 붙여, '발해 세자 자칭설'의 진원지 중 하나가 되어 있다. 또한 『명사』 이원명전 등 중국 문헌과 대조해 보면, 고려말 명나라와 국경분쟁 대상이 된 철령위 문제에서 '철령'은 강원도의 철령이 아니라 요동의 철령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근거자료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약용은 강원도의 철령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결과적으로 그후 조선사 편수회의 주장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영문 초록

Jeong Yak-yong wrote two “Japan Theory” 『日本論』 which argued that there was no need to worry about Japanese invasion, but the fact that these arguments were nothing more than armchair theories is evidenced by the results of Japan’s invasion and subjugation that occurred about 40 years after his death. In “Liaodong Theory” 『遼東論』, Jeong Yak-yong also wrote that “it is fortunate that Liaodong was not restored”, and that “if Liaodong were occupied by a country that does not respect military force, the harm would be great.” Jeong Yak-yong’s view of Liaodong seemed to have been specified in his work, “Abanggangyeokgo” 『我邦疆域考』. Although it is clearly recorded in the official history “History of Goryeo” 『高麗史』 that after the fall of Balhae, Crown Prince Dae Gwanghyeon crossed over to Goryeo with tens of thousands of households, Jeong Yak-yong expressed the opinion without providing any evidence that Dae Gwanghyeon may not had been the Crown Prince of Balhae. In addition, according to Chinese historical books such as “History of Ming” 『明史』, there is considerable evidence that in the issue of Cheolyeongwi, which was the subject of the conflict at the end of Goryeo, Cheolyeong referred not to Cheolyeong in Gangwon-do but Cheolyeong in Liaodong, and that the border at that time was also Liaodong. Nevertheless, Jeong Yak-yong insisted that Cheolyeong at that time referred to Cheolyeong in Gangwon-do.

목차

Ⅰ. 머리말
Ⅱ. 천주교 배교 등에서 나타난 면모
Ⅲ. 정약용의 일본론에 대한 비판
Ⅳ. 정약용의 요동론과 관련한 비판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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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상(Tae-Sang Chung). (2024).실학의 집대성자로서 정약용의 영토 관련 인식 비판. 세계역사와 문화연구, (), 8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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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상(Tae-Sang Chung). "실학의 집대성자로서 정약용의 영토 관련 인식 비판." 세계역사와 문화연구, (2024): 8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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