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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14세기 위기, 개경의 再建과 後園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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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
14th Century Reconstruction in Crisis and the Utilization of Gardens in Gaegyeong
발행기관
부경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저자명
정은정(Eunjeong Jeong)
간행물 정보
『인문사회과학연구』제25권 제4호, 123~156쪽, 전체 34쪽
주제분류
사회과학 > 사회과학일반
파일형태
PDF
발행일자
2024.11.30
6,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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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문의
논문 표지

국문 초록

14세기 동아시아 각국 모두 한랭 기근 전쟁과 전란, 복합재난에 국체(國體)의 보존이 어려웠고 결국 왕조가 바뀌었다. 원명 전환· 막부체제의 이완, 고려멸망과 조선 건국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기후한랭도 부수한다. 한랭·가뭄·때이른 눈서리 같은 기상이변에 작물생산량과 낱알 크기는 격감한다. 먹거리 부족에 생존이 어려운 민은 가왜(假倭)라 자칭하거나 이주를 선택했다. 당시 국가 질서는 크게 훼손되어 왕조 교체를 염원하는 욕구가 분출하였다. 고려말 태조유훈·문종구제를 지표로 내건 국체 재조론(再造論)은 전기 이래의 공공성 회복을 지향한다. 국왕은 전쟁과 전란으로 훼손된 자신의 거소이자 권위 공간인 궁궐 전각을 재건하고자 했다. 다양한 채널로서 군신간 수직적 질서도 다져나갔다. 그 노력의 일환에서 국왕 주도로 각종 궁중 연향, 조회·조당제의 정비도 가속되었다. 재해와 잇단 불안감의 만연에 따라 국왕은 민심을 규합하고 안정화하려는 각종 조치를 내놓았다. 국왕 자신의 실책을 반성하는 차원에서 수기책기하는 근신·감면·사시·휼형 조치의 공옥을 단행하였다. 기층민이 생존할 곳을 찾아 떠나자 유리민의 지역 재안착을 유도하고 추포(追捕)도 엄히 실시하였다. 미온적이지만 파괴된 기간을 재건하고, 물·불 방재시스템 같은 도시 환경시설을 구축해나갔다. 이미 인종·명종대 큰 화재를 겪은 얼마 뒤 몽골침입에 도심은 전소되었다. 군데군데 복구가 시도되더라도 불완전한 재건이었다. 미처 전화(戰禍)를 수습하지 못한데다 공민왕 부턴 홍건적·왜구와 전쟁을 치러야했다. 궁궐 외형은 다시 파괴되었다. 전·중기에 정전·편전·내전의 3전체계와 후원으로 운영되던 궁원시스템은 무너졌다. 황제국 질서 아래 작동하던 복수의 정전체계는 고종대 이미 흐트러졌다. 단일 정전 만으로 정무·의례 역할을 소화하기엔 장소적 제약이 따른다. 이에 복원 속도가 빠르고 재화를 덜입은 궁원이 정무·의례행위를 떠맡았다. 이 자체는 매우 복잡하고 가변적이었다. 14세기 다변적인 궁원제의 지형은 내전의 편전화, 편전의 정전화에 있다. 편전·이궁이 원래 정전 기능을 대행하고, 편전 역할은 내전에게 이양되었다. 궁궐 전반이 외전화(外殿化) 경향을 띠면서도 국왕의 사적 영역은 여전히 필요했다. 이에 왕실가족의 휴게처이던 금원구역의 활용도가 높아졌다. 혼효되던 후원(後苑)·후원(後園)은 원(園) 하나로 단일화한데다, 의장을 갖춰 행차해야 하는 공공 장소가 되었다. 공민왕대 이후 ‘꽃 잔치하는 곳’ 본연의 뜻에 충실한 화원(花園)도 조성한다. 우왕은 유독 후원·화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너른 공터를 지닌 후원에는 기마·사열·강무가 치러졌다. 대사(臺榭)·누정(樓亭)·당(堂)을 갖춘 화원은 연향·곡연·꽃 잔치 장소였다. 후원·화원의 장소에 따라 국왕 행동 방식은 이원 분리되었다. 그 분기의 시기는 우왕대이다. 별전, 금원구역 전·후면부, 후원·화원의 운영은 궁원 외형과 시스템이 크게 이완된 고려말에 제시된 미봉책이긴 하다. 복잡한 궁원제의 한가닥 지형은 공식화·공공성에 있다. 때문에 14세기 위기 와중에 추진된 외전화 지향의 궁궐운영은 후일 조선 초 궁원제도에 이어질 지렛대 구실을 한 셈이다.

영문 초록

In the 14th century, East Asia suffered from chronic famine due to drought caused by cold dryness, a decrease in crop productivity, and a lack of food. In the cold spring drought, when pulse rate could not be used as food, they exploited abroad. The Honggeonjeok Waegu invaded Gaegyeong, the capital, the heart of state administration, starting from the outskirts of the southeast coast of Seobuk-myeon. Various key facilities in Gaegyeong and the space in the palace, the king's residence, were completely destroyed during this period. The palace pavilion, the king's residence, is a place that symbolizes the monarchy. Palace reconstruction also corresponds to the establishment of sovereignty. However, reconstruction was not easy due to the depletion of construction equipment and manpower. The restoration of the Goryeo national public order distorted by the Yuan was a common concern for the king at the time. The national reorganization project, which the reform monarch put forward as an indicator of Taejo Moon Jong-jo, was a measure considering the restoration of the public nature of the Goryeo-based national order since the first half. The king of the late Ryomal wanted to rebuild his residence and palace pavilion, which were damaged by war and war. As a variety of channels within the monarch's own radius of activity, the vertical order between the military gods was also established. In addition to the invasion of Mongolia and the Red Turban War, most of the palace's palaces were burned down due to drought and tragedy. It was not easy to perform various political ceremonies led by the king in the royal court. Originally, the venue for Yeonhui, led by the king, was Daegwanjeon. Official and periodic meetings between military gods correspond to 'jo' in a broad sense. The public place where “Jo” was promoted is a Jodang with the palace's pyeonjeon hall as an outline. In addition to the invasion of Mongolia and the Red Turban War, Even in the King Gongmin's reign, which was represented as the monarch of the semicircular reform, official political and political ceremonial activities led by the king are not found. From King Gongmin to King Gongyang, Garden” was the best. In the 14th century, it was not easy to reconstruct the palace system due to the increase in the invasion of Mongolia, the invasion of the Red Turban Japanese pirates, and frequent political strife. Repeated restoration and the hybridization and differentiation of the Byeolgung Sponsor Garden have been evaluated only as the collapse of the late Goryeo system as a lack of a unified state system. Political activities continued from the sponsorship, which was a civil war, and foreign currency progressed, and the king's official actions were discriminatory in the front and rear of the sponsorship itself. In the midst of incomplete reconstruction of the destruction of complex disasters in the 14th century, sponsorship was adopted as at least a third place to act on behalf of political and ceremonial activities. I think that the trip to the sponsoring garden, which had been criticized negatively, was a self-rescue measure that came amid the king's search for reform and maintenance of state affairs at the end of the Goryeo Dynasty.

목차

Ⅰ. 서론
Ⅱ. 14세기 위기-한랭 재난 파괴
Ⅲ. 불완전한 再建
Ⅳ. 後園 花園의 분화와 운용
Ⅴ. 결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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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정(Eunjeong Jeong). (2024).14세기 위기, 개경의 再建과 後園 활용. 인문사회과학연구, 25 (4), 123-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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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정(Eunjeong Jeong). "14세기 위기, 개경의 再建과 後園 활용." 인문사회과학연구, 25.4(2024): 123-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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