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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광대’와 ‘판소리’에 대한 몇 가지 논의들

이용수 16

영문명
Some Discussions about ‘Gwangdae (광대)’ and ‘Pansori (판소리)’ in the Joseon Dynasty
발행기관
판소리학회
저자명
손태도
간행물 정보
『판소리연구』제36집, 211~266쪽, 전체 56쪽
주제분류
인문학 > 언어학
파일형태
PDF
발행일자
2013.10.31
9,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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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문의
논문 표지

국문 초록

그동안 판소리사에 대한 연구들 중 ‘광대와 판소리’에 한정시켜 논의한 것들은 김동욱, 이보형, 필자의 것들이 아니었나 한다. 김동욱은 경기이북의 광대와 경기이남의 광대가 다르다고 하고, 판소리에 있어 중요 집단인 경기이남의 광대들이 판소리 광대 외에도 무부(巫夫), 관아의 악공, 국가의 산대희에 동원되는 재인(才人) 등의 역할도 한 것을 논의했다. 이보형은 판소리는 하나의 신분 집단으로 경기이남의 광대집단인 화랑이집단이 부른 것이기에, 판소리는 이들이 부르는 다른 광대소리들과 관계해서 논의해야 된다고 했다. 필자는 광대집단으로 기존에 알려진 경기이남의 세습무 집안의 남자들인 화랑이집단 외에도 경기이북의 재인촌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새로이 설정하고, 이들의 공통점은 악공집단인 것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판소리는 이들 광대집단 사람들이 판소리 이전에 가졌던 화극(話劇), 재담소리의 맥락에서 성립했다고 했다. 여기에서는 그동안 필자가 하여왔던 연구들의 연장선상에서 오늘날 주요하게 논의되어야 할 ‘광대’ 혹은 ‘판소리’와 관련되는 몇 가지 사실들을 제시해 본다. 1. ‘광대(廣大)’는 원래 ‘큰 가면(假面)’ 뜻하던 말이었고, 고려·조선시대는 이러한 가면들을 신분이 낮은 천민(賤民)들이나 썼다. 그래서 그런 가면들이나 쓰는 천민 부류의 사람들을 ‘광대’라 하기에도 이르게 된다. 판소리 창자를 전통사회에서 흔히 ‘광대’라고 한 것은 판소리 창자들도 원래는 이러한 가면들이나 썼던 천민들이었기 때문이다. 1. 동아시아 유교권의 다른 나라들과 같이 우리나라에서도 적어도 고려시대부터는 대궐 안에서만 살아 대궐 밖의 일들을 잘 모르는 임금을 위해 한 명의 연희자가 중심이 되어 간단한 흉내내기와 재담을 동원하여 하는 1인 소극(笑劇) 형태의 화극(話劇) 공연의 전통이 있었으며, 그 화극의 담당자는 악공집단으로 제도화되어 있었다. 판소리는 적어도 고려시대 이래의 이러한 화극의 연장선상에서 성립했다. 곧 재담극이라고도 할 수 있는 화극에 조선 후기에는 소리까지 곁들여진 이른바 재담소리가 성행했고, 그 재담소리가 판소리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판소리 광대도 원래는 화극을 담당한 악공집단이었던 셈이다. 1. 판소리는 재담소리들 중 서사시적 재담소리의 연장에서 성립한 일종의 광대 서사시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광대들의 서사시적 노래의 원류로 흔히 무당들의 서사무가를 많이 들어왔다. 그런데 경기도당굿에는 오늘날에도 무부(巫夫)인 화랑이가 ‘군웅거리’와 ‘손님거리’에서 <군웅노정기>, <손님노정기> 같은 일종의 서사무가를 부른다. 이러한 화랑이들이 부르는 서사무가들이 무당의 서사무가보다 판소리에 더 가깝다 볼 수 있다. 이들 굿판의 화랑이가 다른 자리에서는 판소리 광대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화랑이가 부르는 서사무가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1. 김동욱은 남원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던 <춘향가>의 원작으로서의 양주익의 <춘몽연>설을 부정했다. 그가 그 사실을 부정하게 된 것은 양주익은 1954년에 과거 급제를 하고 그의 연보(年譜)에도 1756년에 <춘몽연>을 지은 것으로 기재되어 있지만, 판소리사에서는 1754년에 이미 류진한의 <만화본 춘향가>가 나왔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양진사 소작설’이라고 해서 양주익은 1753년 과거 때 진사에 입격했고, 1754년에는 장원급제했다. 그리고 <만화본 춘향가>의 작가 류진한은 1753년 호남지역을 다니려 왔다 광대의 <춘향가>를 들고 이를 시로 남겼다. 또한 오늘날까지도 남원의 고로(古老)들은 <춘향가>를 양주익이 지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로 보아 <춘향가>의 원작으로서의 양주익의 <춘몽연>은 사실로 여겨진다. 1. 판소리의 성립과 전승에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이 경기이남의 광대집단인 경기이남의 세습무 집안의 남자들인 화랑이집단이다. 이들이 무부·악공·광대로 광대집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집안내림으로 무업(巫業)을 잇는 세습무 집안의 존재를 호적(戶籍)과 같은 객관적 자료로 입증할 수 있을까? 임학성은 경상도 단성현 호적들을 통해 6대째 무업을 한 박진명 가계, 5대째 무업을 한 최운, 조송죽, 김어선 가계 등을 밝혔다. 전통사회 세습무의 존재를 실제 호적과 같은 객관적 자료로 입증한 것이다. 오늘날 경기도지역의 대표적 세습무 집안 이용우(1889~1987) 가계의 경우 현재 무업을 하고 있는 외손녀 김순중을 기준을 할 경우 8대째 무업을 하고 있는 것을 집안에 내려왔던 문서들과 족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판소리가 불리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조선시대의 예술이었던 판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그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럴수록 판소리사에 대한 전망이 더욱 요구된다.

영문 초록

I guess Kim Dong-uk, Lee Bo-hyeong, and me importantly discussed ‘Gwangdae and Pansori’ in the history of Pansori. As extension of my studies, the issues about ‘Gwangdae and Pansori’ are as follows. 1. The Reason that the Pansori Singer was Called ‘Gwangdae’ : Originally ‘Gwangdae (광대, 廣大)’ meant ‘big mask’. Only the lowest people wore that sort of the mask. And the people that wore the mask themselves were called ‘Gwangdae’ too. The reason that Pansori singer was called ‘Gwangdae’ was that they were the lowest statue people like the ones that wore the mask. 1. Hwageuk (화극, 話劇), the Previous Performance of Pansori, and the People Who Charge It : Hwageuk looks like a farce performed by one jester. It was performed by simple mimics and jokes. Originally it was made for king in palace in Confucian East Asia for the purpose of having him know better about the things outside of palace. And the office musician was institutionalized to do that performance. Hwageuk was developed as Jaedam-sori in later Joseon dynasty. Jaedam-sori was developed as Pansori. Therefore Pansori was on the line of Hwageuk and Pansori singer was basically office musician too. 1. Narrative Shaman’s Songs Sung by Hwarang-i (화랑이) : Pansori has the aspect of narrative song. In this case, we usually talk about the female shaman’s narrative song. The Hwarang-i (the man of hereditary shaman family) has sung narrative shaman songs like and in village shaman ritual in Gyeonggi-do. This Hwarang-i could be a Pansori singer. So the Hwarang-i’s narrative shaman song was closer to Pansori than the female shaman’s one. We should have concern on this Hwarang-i’s one today. 1. Yang Ju-ik, the Author of the Original Text of : Kim Dong-uk denied the opinion that Yang-Jinsa (양진사) wrote the original text of . That opinion had been widely handed down in Namweon area. He said there was Ryu Jin-han’s already at 1754 when Yang Ju-ik passed Gwageo (과거, 科擧. the government exam) at 1754. Yang Ju-ik’s annual report shows that was written in 1756 too. But Yang Ju-ik passed Gwageo first at 1753 and became Jinsa (진사, 進士), after he passed the last Gwageo as a chief at 1754. So he wrote and got Gwangdae sing that work as Pansori in 1753. Meanwhile, Ryu Jin-han visited Jeonra-do area in 1753 and enjoyed the jester’s in that area. After that excursion, he wrote the long poem . In these aspects, the widely spreaded opinion that Yang Ju-ik was the original author in Namweon can be considered as the fact. 1. Seseup-mu (세습무, 世襲巫) Family; Lee Yong-u’s Case : Hwarang-i group, the men of the Seseup-mu (hereditary shaman) family in the southern part of Han River, had played a key role in the establishment and handing down Pansori. This group was Gwangdae group because this group members became the men of the Seseup-mu family, musicians at offices and Gwangdae (the official and hereditary entertainer in traditional Korea) at the performance place. However, can we confirm the existence of Seseup-mu family in Joseon Dynasty through the object file like census registers? Im Hak-seong showed six generations Seseup-mu family, Park Jin-myeong, five generations one, Choi Un, Jo Song-hak, Kim Eo-seon, and so on by the census registers of Danseong Prefecture in Gyeongsang-do province. Lee Yong-u (1889~1987) family, the representative Seseup-mu family in Gyeonggi-do shows eight generations Seseup-mu family by the documents that came down to this family and the genealogy book. We can prove the existence of the Seseup-mu family in traditional Korea. Pansori was one of the Gwangdae’s songs, so we also

목차

1. 머리말
2. 판소리 창자가 ‘광대’로 불린 이유
3. 판소리 이전의 공연물로서의 화극(話劇)과 그 담당자
4. 화랑이가 부르는 서사무가
5. <춘향가>의 작자 양주익(梁周翊)
6. 세습무의 가계; 이용우의 경우
7. 맺음말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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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도. (2013).조선시대의 ‘광대’와 ‘판소리’에 대한 몇 가지 논의들. 판소리연구, (), 211-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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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도. "조선시대의 ‘광대’와 ‘판소리’에 대한 몇 가지 논의들." 판소리연구, (2013): 211-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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