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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후 청난공신(淸難功臣) 선정에 관한 연구

이용수 85

영문명
A Study on the Selection of Cheongnan Gongsin(淸難功臣) After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발행기관
한국사학사학회
저자명
김일환
간행물 정보
『한국사학사학보』제46권, 165~194쪽, 전체 30쪽
주제분류
인문학 > 역사학
파일형태
PDF
발행일자
2022.12.30
6,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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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문의
논문 표지

국문 초록

임진왜란은 조선왕조의 사회적 기반을 붕괴시켜 나갔다. 오랜 전란의 고통에 빠진 백성들의 삶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왜적에게 살해되거나 굶주림과 질병으로 쓰러졌다. 설상가상으로 백성들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 조달을 위해 가혹한 수탈과 부패 관리들에 의한 착취에 시달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탈출구를 찾을 곳은 민중반란 외에 해결책이 없었다. 내포(內浦)에서 일어난 이몽학(李夢鶴)의 난은 이러한 시대 상황과 흉흉한 민심을 타고 발생한 민중 반란 사건이다. 이몽학의 난은 규모도 크고 봉기에 성공하여 내포지역 5개 고을이 점령되어 조선왕조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의 민란이었다. 따라서 임진왜란이 종식되자 조선왕조정부는 임란 극복에 공헌한 수훈자들에 대해 공신 책훈을 실시하면서 이몽학의 난 진압에 수훈한 인물들도 공신 책봉의 대상으로 하였다. 이것이 청난공신(淸難功臣)이다. 하지만 청난공신의 책봉은 호성(扈聖), 선무(宣武)공신과 마찬가지로 많은 논란으로 인해 쉽게 끝나지 못했다. 공신 책봉을 보는 정치적 입장이 상이함에 따라 국왕 선조와 대신, 또 대간(臺諫) 간에 조성된 첨예한 대립으로 공신 책봉은 난산(難産)에 난산을 거듭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공신 책봉을 가급적 축소하려는 대간들과 정훈(正勳)에 거론된 인물을 포함해 가급적 널리 포상하려는 선조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였기 때문이다. 전란 후에 추락한 민심을 수습하고 왕권에 대한 지지세를 확장하는데 공신 책봉을 활용하려는 선조의 의도가 신하들과 충돌한 것이다. 이러한 논란을 극복하고 공신 책훈이 완결된 것은 선조가 책봉의 명을 내린 지 4년이 되어서야 가능하였다.

영문 초록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destroyed the social foundation of the Joseon Dynasty. The lives of the people in the throes of a long war were completely destroyed. Killed by Japanese enemies or collapsed from hunger and disease. To make matters worse, the people suffered from harsh exploitation and exploitation by corrupt officials to procure the supplies needed to carry out the war. In this situation, there was no solution other than the popular revolt to find a way out. Lee Mong-hak's rebellion, which occurred in Naepo, was an incident of popular rebellion that occurred with this situation of the times and terrible public sentiment. Lee Mong-hak's rebellion was large and successful in the uprising, and five villages in Naepo were occupied, threatening the existence of the Joseon Dynasty. Therefore, at the end of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the Joseon Dynasty's Ministry of Government Control gave meritorious service to the veterans who contributed to overcoming the Imran, and the figures who were honored in the suppression of Lee Mong-hak's rebellion were also subject to meritorious service. This is the Cheongnan Gongsin. However, like Hoseong and Seonmu, the Cheongnan Gongsin's chaekbong did not end easily due to many controversies. As the political position of looking at the Gongsin Chaekbong differed, the Gongsin Chaekbong was forced to have difficulties due to the sharp confrontation created between the king's ancestors and the Daegan. The reason for this is that the position of Seonjo to reward as widely as possible, including the person mentioned in Jeonghun, was sharply opposed with the grandfather who wanted to reduce the number of meritorious officials as much as possible. Seonjo's intention to use the Gongsin Chaekbong to recover the public sentiment that fell after the war and expand support for the royal authority clashed with his subjects. Overcoming this controversy, it was not until four years after King Seonjo ordered Chaekbong to be completed.

목차

Ⅰ. 머리말
Ⅱ. 청난공신 책봉 과정
Ⅲ. 청난공신 인적 사항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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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환. (2022).임진왜란 후 청난공신(淸難功臣) 선정에 관한 연구. 한국사학사학보, (), 165-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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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환. "임진왜란 후 청난공신(淸難功臣) 선정에 관한 연구." 한국사학사학보, (2022): 165-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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