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南唐 都城 金陵과 郊廟儀禮
이용수 53
- 영문명
- Namdang castle town, Geumneung, and Gyomyo Ritual
- 발행기관
-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 저자명
- 김상범(金相範)
- 간행물 정보
- 『역사문화연구』제82집, 189~222쪽, 전체 34쪽
- 주제분류
- 인문학 > 역사학
- 파일형태
- 발행일자
- 2022.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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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이 논문은 국가제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郊廟儀禮를 중심으로 남당 도성에 있어서 전통의례의 시행정황과 그 특징을 검토해 보았다. 오대십국시기의 황제들은 대체로 郊祀를 천자의 受命과 권력의 정당성을 선포하는 최상의 의례로 인식하고 중요한 시점마다 이를 활용하였다. 이변 역시 남당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대제사를 올렸는데, 먼저 태묘에서 朝享을 거행하고, 다음 날 남교 원구단에서 고조 신요황제를 배사하여 호천상제에 대한 제천의례를 지냈다. 이변의 즉위례는 비록 삼대례를 온전하게 거행하지는 못했지만, 남교와 태묘의례 즉 ‘교묘례’를 동시에 거행한 것이다. 삼대례의 교사 방식을 구현했던 후당에는 못 미치지만, 기본적으로 당대후반기이래 교사와 종묘 대제사에 보이는 변화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교묘의례 관련 논의는 원종시기에 이르러 더욱 심층적으로 전개되었다. 원종이 비록 대제사의 거행을 천하통일 이후로 미뤘지만, 정례적인 의례는 유사섭사의 형태로 거행되었다. 교묘 의례이론에 관한 논의 가운데 교사에 있어서는 동지원구와 맹하우사 외에 맹춘기곡이 추가되었다. 태묘의례는 義祖 徐溫과 天子七廟를 조성하기 위해서 급하게 날조된 四親의 위패가 별도의 사당으로 이관되었고, 당조의 방식대로 경황제, 고종, 태종에 중흥주인 烈祖가 추가되고, 당조의 의종, 희종, 소종의 신주를 합사하였다. 대당제국에 대한 계승의지를 의례를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영문 초록
這篇論文, 以南唐政權的都城金陵爲中心, 探討都城史上‘禮儀城市’傳統的繼承與變化. 首先考察了金陵發展爲一國都城的趨勢以及具備禮儀空間的過程. 金陵城市史的巨大變化發生於天祐6年(909)徐溫就任昇州刺史之後. 徐知誥以昇州防遏使兼船副使推行了大規模的羅城及城壕工程, 而金陵逐漸具備了核心城市的規模, 並加強了防禦功能. 第二次變化發生於太和3年(931)徐知誥掌權之時. 爲了具備皇帝都城的威嚴, 徐知誥以大唐長安的皇城爲典範, 增修殿閣, 提高名號了. 值得矚目的是體現禮儀城市的特性, 建立了主要禮儀設施. 先設定了正殿連結於南郊圜丘壇的中軸線, 並以中軸線上的南北御街爲中心, 營造成‘左祖右社’的禮儀空間. 如此, 金陵共有皇帝居所宮殿與祭祀天地丶宗廟丶社稷等壇廟, 而正式具備了禮儀城市的規模.
爲了加強政權的正當性, 並解決現實政治的需求, 勝元三年(939)南唐烈祖李昪在金陵舉行了大祭祀. 值得注目的是這次祭典以宗廟和南郊合而爲一, 亦即郊廟禮儀一并擧行. 這可以說是唐代後期以來出現的三大禮的繼承. 江淮地區本身,地域意識也鞏固, 而從外進入樹立政權的吳丶南唐, 獲得當地豪族和老百姓的支持, 專心尊重和收容禮儀和信仰所包含的地域性歷史意識. 在南唐政府的積極公認和後援下, 陳果仁丶張子文神等逐步成長爲區域神, 幷進入都城裡面. 總之, 十國時期都城金陵的案例看, 雖然區域和民間因素的介入, 禮儀城市的傳統裏面也開始發生變化, 但都城基本上仍然繼承著禮儀城市的傳統性格.
목차
Ⅰ. 머리말
Ⅱ. 금릉의 부상과 도성건설
Ⅲ. 남당건국과 勝元3년의 郊廟儀禮
Ⅳ. 元宗시기 교묘 관련 논의와 그 의미
Ⅳ. 맺음말
해당간행물 수록 논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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