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唐代 접경공간으로 三受降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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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문명
- The Sanshouxiangcheng as the Contact Zones of the Tang Dynasty
- 발행기관
-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 저자명
- 이춘복(Lee Chun Bok)
- 간행물 정보
- 『역사문화연구』제71집, 3~38쪽, 전체 36쪽
- 주제분류
- 인문학 > 역사학
- 파일형태
- 발행일자
- 2019.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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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 군사 40만 명에 1만 리의 땅을 차지할 정도로 대제국을 건설한 돌궐제국은 황하를 넘어 오로도스의 광활한 접경지역을 침략과 약탈의 전쟁터로 만든다. 8세기 초 돌궐이 오로도스 남단에 위치한 鳴砂縣의 대규모 전투에서 승리하고 당 수도 장안을 턱밑까지 진격하게 되자, 당은 자신들의 안위를 걱정해야할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강력해진 돌궐의 침략과 약탈로 인해, 수도 장안까지 위협을 받게 된 당으로서는 돌궐의 위협에 대한 근본적이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근본적인 대책이 바로 장인원의 건의에 의해 건립된 삼수항성이었다.
삼수항성은 708년 장인원에 의해 오로도스(河套) 북쪽에 위치한 황화 북안에 수축된 3채의 城壘이다. 오로도스 지역은 한자로 궤(几)자 모양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황하는 이 오로도스의 외곽선을 따라 선회하며 흐르고 있다. 삼수항성의 위치는 황하 물줄기가 几자의 서쪽 하단(오늘날 蘭州)에서 북상하여 동쪽으로 거의 90도 각도로 굴절되는 지점인 황하북안 서북쪽 모서리 부근에 西受降城을, 서에서 동으로 흘러 또다시 물길을 남쪽으로 90도 각도로 굴절되는 황하북안 동북쪽 모서리 부근에 東受降城을, 그리고 서수항성과 중수항성의 중간지점에 中受降城을 각각 설치하였다. 서수항성↔중수항성↔동수항성 성루 간의 거리는 400里로, 황하 물줄기를 따라 동서로 총 800리로 알려졌다. 삼수항성의 군사적 관할 동서뿐만 아니라, 삼수항성을 기점으로 북으로 300여리에 위치한 牛头朝那山 이북 지역까지 이어진다. 그 관활 방식은 우선 이들 지역에 1800여 곳의 봉수대를 설치하여, 동서와 남북으로 봉수대를 포진시키는 것이었다. 3개의 성채와 1800여 곳의 봉수대 등 군사기지와 군사시설물들이 마치 부채살과 거미줄을 펼쳐 놓은 것처럼 군사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이들 고정된 군사시설물들이 작동하게 하는 병력배치, 물자수송 및 군량보급 등 일련의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삼수항성은 천연방어선인 황하 북안에 설치된 유목국가인 돌궐과 농경국가인 당을 경계 짓는 국경을 상징하는 인공건축물이다. 삼수항성의 건립은 돌궐의 거듭되는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당에게 정당방어적 성격이 있었다. 다만, 삼수항성이 당시 당의 국경인 황하를 넘어 돌궐의 강역에 축성되었다는 것은 당제국의 침략성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삼수항성에 대한 북방 정복왕조의 기억은 거의 망각수준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한족왕조인 송대에는 지리서와 군사서적 및 사전류 문헌에서 장인원과 삼수항성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를 근거로 서하지역을 수복하자는 정치적 주장은 확인되지 않는다. 명대의 한족문인들은 국경의 상징물로 唐代 삼수항성의 정당방위 성격을 강조하고, 오르도스 지역을 방어하는 모범적인 전례로 제시한다. 그러나 장인원과 삼수항성에 대한 명대인들의 기억과 현실 적용은 선택적이었다. 장인원의 삼수항성 건립의 대전제는 국경 밖 돌궐의 땅을 탈취해서 돌궐의 땅에 삼수항성을 건립하자는 것이지만, 명대 東勝衛와 오르도스 수복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면 황하이북 지역에 대한 논의는 없고 서수항성이 건립된 풍주에 대한 언급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주된 관심 대상은 唐代 동수항성이 위치한 지역인 東勝衛의 수복과 이를 바탕으로 한 오르도스에 대한 압박 혹은 수복이 전부였다.
영문 초록
The Tujue, who built a great empire that was able to mobilize 400,000 soldiers and to occupy territories by 10,000 li(里) from the late 7th century to the early 8th century, went beyond the Yellow River and turned the vast Ordos borderlands into a battlefield by invasion and plunder. The Tang dynasty came to fall in an emergency in the early 8th century when the Tujue won a victory at the massive battle of Mingsha district(鳴砂縣), south of the Ordos, and then advanced as far as the Tang’s capital city, Chang’an. The Tang dynasty had to seek for a fundamental measure to face against the Tujue’s threat, which was the Sanshouxiangcheng(three cities for reciving surreders) that was built at the suggestion of Zhang Renyuan.
The Sanshouxiangcheng was composed of three fortresses built in AD 708 on the north side of the Yellow River, north of the Ordos. The Yellow River formed the area like the Chinese letter 几(ji) where the Ordos region was located inside. The Sanshouxiangcheng was built along the northern line of the 几(ji) with Xishouxiangcheng(西受降城) at the western end, Dongshouxiangcheng(東受降城) at the eastern end, and Zongshouxiangcheng(中受降城) at the midpoint. The distance between each fortress was 400 li, and so 800 li in total along the Yellow River from east to west. The defence range of the Sanshouxiangcheng covered not only the east and west, but also north of Niutouchonashan(牛头朝那山) located about 300 li far from it. The way of controlling the region was as follows: first, some 1,800 beacon stations were installed in those areas, east, west, north and south; second, military bases and installations including the three fortresses and the 1,800 beacon stations established military network shaped like spiderweb; third, a series of institutions were prepared, such as military deployment, transportation and supplies, that enabled those fixed military installations to function efficiently.
The Sanshouxiangcheng was a borderline, artificially constructed on the northern side of the Yellow River, a natural defence line, to separate the agricultural Tang from the nomadic Tujue. The Sanshouxiangcheng had a self-defence nature for the Tang because it was built to defend against the repeated invasions of the Tujue. On the other hand, the fact that the Sanshouxiangcheng was built in the territory of the Tujue beyond the Yellow River, the Tang’s border at the time, also made the aggression of the Tang undeniable. Nevertheless, the Sanshouxiangcheng was a landmark for Han Chinese writers in the mid and late Tang, Song, Ming dynasties when the northern nomadic threat of invasion towards the Han Chinese dynasties was great. Thus, it was presented as a typical example of considering the Sanshouxiangcheng to emphasize the nature of self-defence against the barbaric Tujue and to defend against the invasion of the northern peoples.
목차
머리말
1. 당 초기 당·돌궐 간 국경선으로 黃河와 豐州의 존치여부
2. 돌궐의 중국 공격과 황하이남 오르도스의 위기
3. 삼수항성 축성과 그 영향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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