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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지방관 역임 시기의 왕안석

이용수 447

영문명
발행기관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저자명
이근명(李瑾明)
간행물 정보
『역사문화연구』제32집, 117~145쪽, 전체 29쪽
주제분류
인문학 > 역사학
파일형태
PDF
발행일자
2009.02.28
6,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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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문의
논문 표지

국문 초록

知鄞縣의 任期가 滿了된 이후 王安石은 首都開封으로 올라가 2년 정도 守闕하였다. 이때 宰相인 文彦博이 그의 恬退를 높이 사서 破格的으로 拔擢하자고 推薦하였다. 王安石은 첫 官職인 簽書淮南判官에 任命된 후 10여년이 흐르기까지 단 한 차례도 高官들에게 接近하여 官職을 請託한 적이 없었다. 朝廷에서 館職에應하라는 詔書가 내려졌을 때에도 一貫되게 辭讓하는 態度를 取했다. 이러한 名利에의 無慾은 당시 士大夫社會에서 매우 異例的인 것이었다. 훗날 王安石의 名 望이 높아지는 데에는 이러한 官職에 대한 超然함이 큰 작용을 미치게 된다. 1051년 王安石에게 새로운 官職이 수여되었다. 淮南東路의 舒州通判職이었다. 舒州通判시기 왕안석의 行蹟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感事><發廩><兼倂>등의 詩文을 몇 편 남기고 있을 뿐이다. 이들 詩文에서 그는 고통 받는 농민들에 대해 깊이 同情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兼倂家를 反對하고 있으며 국가권력 및 官吏의 搾取에 대해서도 큰 敵愾心을 드러내고 있다. 1054년 왕안석이 舒州通判職을 마치고 開封에 도착하자, 朝廷에서는 集賢校理라는 館職을 내렸다. 이에 대해 왕안석은 4차례나 上奏文을 올려 辭讓하고, 困窮한 집안 사정을 들어 地方官職에 任用해 줄 것을 請願하였다. 朝廷에서는 群牧判官이란 職責을 賦與하였다. 왕안석은 이에 대해서도 固辭하는 姿勢를 취하다가 歐陽脩의 勸誘를 받아들여 이를 受容하였다. 이후 그는 中央官으로 在職하며 여러 새로운 인물들과 交往하게 된다. 文壇의 대선배이자 同鄕出身이었던 歐陽脩와 對面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또 司馬光과 韓維, 呂公著등과도 대단히 親密하게 지내서, 世間에서는 이들 네 사람을 두고 ‘嘉祐四友’라 부르기도 했다. 왕안석은 中央官으로 勤務하면서도 持續的으로 地方官任用을 請願하였다. 이러한 要請이 받아들여져 1057년 知常州의 職責이 授與되었다. 知常州시기 왕안석은 意慾的으로 運河를 整備하는 사업을 推進하였다. 당시 常州의 懸案問題였던 水災에 對應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運河整備事業은 여러 가지 要因으로 말미암아 失敗로 돌아가고 만다. 그 自身너무 무리하게 工事를 推進했던 것도 실패의 重要한 要因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知常州로 赴任한 지 10개월 후 그는 다시 江東提刑에 任命되었다. 江東提刑으로 勤務한 기간은 더욱 짧았다. 半年남짓에 불과한 시간이 흐른 후 그는 中央으로 불리워져 三司度支判官에 임명되었다.

영문 초록

在鄞縣任滿之後,王安石赴開封府,守闕約兩年時間。此時,宰相文彦博器重他的‘不求名利’,而要破格拔擢他使擔任更重要的官職。王安石就任其最初官職簽書淮南判官後十餘年間,從未迎合高官而乞求官職。當朝廷下詔勉強他去擔任官職的時候,始終一貫地竭力辭免。這‘不求名利’的態度在當時士大夫社會上,是非常罕見的。後來,這種精神和態度對於他自己的名望高,起到很大的作用。皇祐三年(1051年),王安石被命為新的官職,即淮南東路的舒州通判之職。關於王安石在擔任舒州通判期間的事蹟,可以考知的,為數不多,只能從〈感事〉、〈發廩〉、〈兼倂〉等三首詩中看到他對當時現實的看法和態度:他對農民處境的艱苦生活持有同情的態度。又堅持反對兼倂,對專制權力和官吏的剝削也顯露出反感和憎恨。至和元年(1054年),王安石在舒州通判任滿之後,一到開封,朝廷就授他為集賢校理之職。對此,王安石上四次奏章辭謝,以家貧口衆為由,請求讓他擔地方官之任。朝廷又命他為群牧判官之職。王安石想再次辭謝,然聽歐陽脩的勸告而接受此命。此後,他任中央官職,與一些新的人士交往:與文壇先輩、老鄕歐陽脩相識的是此時期。又因與司馬光、韓維、呂公著等人的關係很密切,而世人稱此四人為‘嘉祐四友’。王安石在中央任職辦公中,也堅持向朝廷申請讓他擔任地方官。1057年,朝廷終於允許王安石之請,而授他為知常州之職。在任知常州時期,王安石積極推進開鑿一條運河的工程,是為了解決當時常州境内的水災問題。但是,由於各種原因,這項修理運河工程半途而廢,告失敗了。在進行這項工程過程中,他自己不顧客觀條件和環境而勉去做可能, 強, 就是其失敗的主要原因之一。上任知常州十個月後,他被任命為江東提刑,但其在任時間更爲短暫。過才半年的時間後,王安石被召命為三司度支判官。

목차

Ⅰ. 머리말
Ⅱ. 서주통판 재임 전후의 일들
Ⅲ. 최초의 중앙관 생활 : 군목판관
Ⅳ. 지상주와 강동제형 시기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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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명(李瑾明). (2009).지방관 역임 시기의 왕안석. 역사문화연구, 32 , 117-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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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명(李瑾明). "지방관 역임 시기의 왕안석." 역사문화연구, 32.(2009): 117-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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