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조선왕실의 혼례관 연구 - 국왕의 혼례를 중심으로
이용수 0
- 영문명
- A Viewpoint of Wedding in the Royal House of Joseon Dynasty : Concentrating on the Emperor's Wedding
- 발행기관
-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 저자명
- 이정숙(Jeong-Sook Lee)
- 간행물 정보
- 『동양학연구』제13집, 47~72쪽, 전체 26쪽
- 주제분류
- 인문학 > 역사학
- 파일형태
- 발행일자
- 2017.02.28
5,920원
구매일시로부터 72시간 이내에 다운로드 가능합니다.
이 학술논문 정보는 (주)교보문고와 각 발행기관 사이에 저작물 이용 계약이 체결된 것으로, 교보문고를 통해 제공되고 있습니다.
국문 초록
본 연구는 조선 국왕과 왕비의 혼례를 통해 조선왕실의 혼례관을 고찰한 것이다. 조선의 오래된 혼속은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으로 남자가 여자집으로 가서 여자가족의 일원이 되어 살다가, 형편에 따라 본가로 돌아가거나 일가(一家)를 이루어 살았으며 처의 부모도 자신의 부모처럼 여겼다. 그런 이유로 외가에서 유년기를 보낸 아이가 나중에 외손봉사(外孫奉祀)하는 것이 특별하지 않았다. 조선은 국초에 유교를 천명하고, 이에 대한 실천의례서인 『주자가례』를 전범(典範)으로 여겼다. 조선 조정은 『주자가례』의 친영례(親迎禮) 시행을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하였으며, 국초부터 왕실에서는 솔선수범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조선국왕의 혼례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왕비를 맞아드리는 의식’ 의주(儀註)가 있으며, 혼례절차는 납채(納采), 납징(納徵), 고기(告期), 책비(冊封), 친영(親迎), 동뢰(同牢)를 육례(六禮)로 규정하고 있다. 오례의에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실록에는 의혼(議婚)은 혼인을 결정하면, 진헌색(進獻色)을 설치한 후 금혼령(禁婚領)을 선포하고, 후보자 중에서 세번의 간택을 통해 결정하는 방식이었으며, 묘현(廟見)은 『국조오례의』에는 보이지 않다가 『국조속오례의』「길례」편에 왕비의 “알종묘영령전의(謁宗廟永寧殿儀)” 의주가 나타나고 있어 왕비묘현은 『국조속오례의』가 간행되는 즈음에 시행된 것을 알 수 있다. 중종은 신료들의 극렬한 반대에 불구하고 조선왕실의 오래된 과재인 『주자가례』친영을 관철시켰고, 자신도 문정왕후를 친영으로 맞이하였다. 그렇지만 왕비묘현을 거부함으로서, 혹자는 친영한 것은 자신의 말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왕비묘현례 시행이 요구되자 중종은 “전조에서 시행 한바가 없는 일이다”하였고, 선조는 인목왕후를 친영하였을 때에, 예조에서“묘현한 뒤에라야 부도(婦道)가 이루어져 자리가 정해진다”고 하자 “이미 대비전에 조현(朝見)하였고 또 천자에게 고명(誥命)을 청한 이상 어떻게 부도를 이루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그리고 묘현을 처음 실행한 숙종은,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거행하는 것이 참으로 정례(情禮)에 맞는다”고 하는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혼례는 혼인을 성립시키는 의식절차로서, 유교에서는 두 가문의 좋은 성이 결합하여 위로는 종묘(조상)에 섬기며, 아래로는 후세를 이으려는 것이라 하고, 그렇기 때문에 혼례 의식은 삼가고 엄숙하게 거행하며, 여자는 친영을 하고 묘현이 있은 후 비로소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며느리가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실질적인 혼례의식은 친영 후 희생을 같이 먹고 시부님을 뵌 후, 묘현이 있고난 다음에 끝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왕실은 종법적 가족제도를 시행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목적에 치중한 나머지, 유교혼례 절차가 종법제도를 실현하는 하나의 틀이라는 측면을 도외시함으로서, 묘현을 행하지 않는 것이 미완의 혼례라는 자각이 없었다. 그로인하여, 조선왕실은 왕조가 성립된지 300년 후에 비로소 친영 후에 묘현을 행하였고, 그 80년 후에 왕비 묘현 의주가 오례의에 규정됨으로서 유교혼례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영문 초록
This paper examined a viewpoint of wedding in the royal house of the Joseon Dynasty through the wedding of the King and Queen. An old wedding tradition in the Joseon Dynasty says Namguiyeogahon, which means a bridegroom goes to a bride's home to become one of her family members in order to live there and then stays there to treat her parents as his ones or is back to his home for his own reasons. Therefore, it is not unusual that an adult who lived his childhood at his mother's side serves sacrificial rites for his mother's side. Joseon declared Confucianism as the national religion in the beginning of the Dynasty and designated Jujagarye, a practical courtesy textbook, as an example. Joseon devoted himself to spreading of Jujagarye and the royal family took the lead. A ceremony for greeting the queen’was recorded ‘ceremony for greeting the queen’for the wedding of the king in the Joseon Dynasty on Gukjooryeui. The procedures for the wedding defined Napchae, Napjing, Gogi, Chaekbi, Chinyeong and Dongrwai as the Six Manners Uihon, not written in Oryeui, indicated that in a true record Jinheonsak was installed after a wedding was determined and Geumhonryeong was declared, then one would be successful among three selected candidates. Myohyeon did not appear in Gukjooryeui, but Uiju of “Aljongmyoyeongnyeongjeonui”of the queen appeared in 「Gillye」of Gukjosokoryeui. As a result, it was known that Myohyeon of the queen was implemented when Gukjosokoryeui was published. A wedding ceremony ought to be held humbly and sternly and a bride does Chinyeong and serves sacrificial rites for ancestors to become a daughter-in-law after Myohyeon. So, an actual wedding comes to an end after a bride meets the parents of her husband with Chinyeong, Heesaeng and Myohyeon. However, Joseon could not think that a wedding is incomplete without Myohyeon as Joseon laid emphasis upon a political goal to implement a family law of domestic relations and ignored the procedures of a wedding in Confucianism as a tool to settle a law of domestic relations. As a result the royal family of Joseon carried out Myohyeon with Chinyeong 300 years after Joseon was inaugurated and then 80 years later Uiju of the Queen Myohyeon was defined on Oryeui to assume an aspect of a wedding in Confucianism.
목차
Ⅰ. 머리말
Ⅱ. 조선왕실의 혼례
Ⅲ. 국왕의 혼례, 왕비를 맞아드리는 의식
Ⅳ. 맺음말
해당간행물 수록 논문
참고문헌
관련논문
인문학 > 역사학분야 BEST
더보기인문학 > 역사학분야 NEW
- Analysis of Criminal Legal Risks and Response Concepts of Artificial Intelligence in the Digital Age
- The Path to Identifying Copyright Attributes of Video Screenshots
- From “Legal Belief” to “Legal Trust” - Analysis of the Theory of Legal Belief and the Negation Theory of Legal Belief
최근 이용한 논문
교보eBook 첫 방문을 환영 합니다!
신규가입 혜택 지급이 완료 되었습니다.
바로 사용 가능한 교보e캐시 1,000원 (유효기간 7일)
지금 바로 교보eBook의 다양한 콘텐츠를 이용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