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검색어

실시간 인기 검색어

학술논문

안용복사건 이후의 독도 영유권 문제

이용수 1

영문명
安龍福事件以後の竹島領有権問題
발행기관
영남대학교 독도연구소
저자명
박병섭(朴炳涉)
간행물 정보
『독도연구』제13호, 135~166쪽, 전체 32쪽
주제분류
인문학 > 역사학
파일형태
PDF
발행일자
2012.12.30
6,640

구매일시로부터 72시간 이내에 다운로드 가능합니다.
이 학술논문 정보는 (주)교보문고와 각 발행기관 사이에 저작물 이용 계약이 체결된 것으로, 교보문고를 통해 제공되고 있습니다.

1:1 문의
논문 표지

국문 초록

안용복 피랍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겐로쿠 다케시마 일건 (元禄竹島一件)’의 결과, 에도 막부(江戶幕府)는 ‘다케시마(울릉도) 도해 금지령’을 내렸다. 이 금지령에 마쓰시마(松島, 독도)의 이름은 없었지만 금지령을 내린 경위를 생각하면 “다케시마 근처의 마쓰시마”도 도해가 금지된 것이다. 게다가 다케시마 · 마쓰시마가 조선영토임은 1724 (교호 享保9)년에 돗도리번으로부터 에도막부에 제출된 「다케시마노 가키쓰케(竹島之書付) 3통」에 부속된 그림지도 「다케시마 도(竹島圖)」에서 확인된다. 이 그림지도는 분명히 다케시마 · 마쓰시마의 한 쌍을 조선영토로 그렸다. 그 후 에도막부는 ‘덴포 다케시마 일건(天保竹島一件)’때에 사건 기록 『 조선 다케시마 도항 시말기(朝鮮竹島渡航始末記)』를 작성했는데 이에 부속된 그림지도에서 다케시마 · 마쓰시마를 조선영토로 그렸다. 이는 ‘겐로쿠 다케시마 일건’의 인식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 인식은 에도시대 말기까지 계속됐으며, 에도막부는 쵸슈번(長州藩)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郎) 등으로부터 제출된 마쓰시마를 포함한 다케시마 개척 청원서에 대해 다케시마는 덴포기에 조선영토임을 확인했다는 이유로 각하했다. 이런 다케시마 · 마쓰시마를 조선영토로 보는 인식은 메이지(明治)정부에도 이어졌다. 메이지 초년에 조선을 내탐하기 위해 부산의 왜관 등으로 파견된 일본외무성 관료들은 ‘겐로쿠 다케시마 일건’을 충분히 조사해 다케시마 · 마쓰시마가 조선영토임을 확인했다. 한편, 일본내무성에서는 지지과가 관찬지지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겐로쿠 다케시마 일건’을 조사해, 다케시마 · 마쓰시마가 일본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이소다케시마 각서(礒竹島覺書)』를 편찬했다. 이 직후 지지과는 태정관으로 옮기고 관찬지지 『일본지지제요(日本地誌提要)』를 편찬했으니 이 책에도 다케시마 · 마쓰시마가 일본영토가 아니라는 인식이 이어졌다. 이처럼 내무성 및 태정관은 다케시마 · 마쓰시마가 일본영토가 아니라는 인식을 가졌으니 시마네현에서 「일본해내 다케시마 외 1도 지적 편찬 질문서(日本海内竹島外一島地籍編纂方伺)」가 제출됐을 때 쉽게 다케시마 · 마쓰시마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인식에 근거해 내무성은 다케시마 · 마쓰시마를 일관해 일본영토 밖으로 하는 관찬지도를 작성했다. 특히 지도 책 ꡔ대일본국 전도(大日本国全圖)ꡕ에서는 1871년부터 1883년까지 일본 각지의 소속의 변천을 지도 12장에 밝혔는데 이 모든 지도에 다케시마 · 마쓰시마는 없으며 일본영토로 취급되지 않았다. 결국, 일본은 역사상 독도를 조선 · 한국 영토로 판단한 일은 몇 번이나 있으나, 독도를 일본영토로 판단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독도를 일본은 제국주의적 수법으로 1905년에 일본땅으로 편입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외무성의 독도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영문 초록

安龍福拉致事件を機に始まった元禄竹島一件の結果、江戸幕府は竹島渡海禁止令をくだした。この禁止令に松島の名はなかったが、禁止令を発した経緯から考えると「竹島近所の松島」へも渡海も禁止されたのである。さらに、竹島· 松島が朝鮮領であることは1724年(享保9)に鳥取藩から幕府へ提出された 「竹島之書付三通」付属の絵図 「竹島図」 でも確認される。同図は明らかに竹島· 松島の一対を朝鮮領に描いた。 その後、幕府は天保竹島一件の時に事件記録 『朝鮮竹島渡航始末記』 を作成したが、それに付属する絵図にて竹島· 松島を朝鮮領として描いた。これは元禄竹島一件の認識を引きついだのである。この認識は幕末に至っても引きつがれ、幕府は長州藩の桂小五郎らから提出された松島を含む竹島開拓願に対し、竹島は天保期に朝鮮領であると確認したという理由で却下した。 このような竹島· 松島を朝鮮領とする認識は明治政府にも引きつがれた。明治初年、朝鮮を内探するために釜山の倭館などに派遣された外務省の官僚は元禄竹島一件の記録を充分調査して竹島· 松島が朝鮮領であることを確認した 。一方、内務省では地誌課が官撰地誌を編纂する過程で元禄竹島一件を調査し、 竹島· 松島が日本のどの国にも属さないことを確認した 『礒竹島覺書』 を編纂した。その直後、地誌課は太政官へ移って官撰地誌 『日本地誌提要』 を編纂したが、同書でも竹島· 松島が日本領外であるとの認識は受け継がれた。 このように内務省· 太政官は竹島· 松島が日本領でないという認識をもっていたので、島根県から 「日本海内竹島外一島地籍編纂方伺」 が提出された時、容易に竹島· 松島は日本と関係ないとの結論を出した。これにもとづいて内務省は一貫して竹島· 松島を日本領外とする官撰地図を作成した。特に地図帳 ꡔ大日本国全圖ꡕでは1871年から1883年まで日本各地の所属の変遷を12枚の地図に示したが、そのすべての地図に竹島・松島はなく、日本領として扱われなかった。 結局、日本は歴史上、独島を朝鮮·韓国領と判断したことは何度かあったが、独島を日本領と判断したことは一度もなかった。そのような独島を日本は帝国主義的な手法で1905年に日本領へ編入したのである。したがって、日本外務省の独島は日本固有の領土であるという主張は成り立たない。

목차

1. 머리말
2. 교호(享保)기의 마쓰시마(독도) 인식
3. 덴포(天保) 다게시마 일건
4. 에도시대 말기 「울릉도 개척에 관한 건언서」
5. 일본 외무성의 조사
6. 내무성의 조사 ꡔ이소타케시마 각서ꡕ
7. 관찬 지지 ꡔ일본 지지 제요ꡕ
8. 태정관 ʻ다케시마 외 1도ʼ 지령서
9. 메이지시대의 관찬 지도
10. 조선에 대한 영향
11. 결론

키워드

해당간행물 수록 논문

참고문헌

교보eBook 첫 방문을 환영 합니다!

신규가입 혜택 지급이 완료 되었습니다.

바로 사용 가능한 교보e캐시 1,000원 (유효기간 7일)
지금 바로 교보eBook의 다양한 콘텐츠를 이용해 보세요!

교보e캐시 1,000원
TOP
인용하기
APA

박병섭(朴炳涉). (2012).안용복사건 이후의 독도 영유권 문제. 독도연구, (13), 135-166

MLA

박병섭(朴炳涉). "안용복사건 이후의 독도 영유권 문제." 독도연구, .13(2012): 135-166

결제완료
e캐시 원 결제 계속 하시겠습니까?
교보 e캐시 간편 결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