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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대한 소련과 러시아의 평가

이용수 1073

영문명
Evaluation of the Soviet Union and Russia for Battles of Bongodong and Cheongsanni
발행기관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저자명
윤상원(Yun, Sang-won)
간행물 정보
『역사문화연구』제56집, 89~118쪽, 전체 30쪽
주제분류
인문학 > 역사학
파일형태
PDF
발행일자
2015.11.30
6,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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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문의
논문 표지

국문 초록

이 글의 목적은 홍범도가 지휘했던 위대한 승리인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소련과 러시아에서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데 있다. 홍범도가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연해주에서 북간도로 넘어온 때는 1919년 10월이었다. 그 시기는 이동휘가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임명되어 한인사회당의 주력들이 상해로 옮겨가던 시기와 일치한다. 상해로 간 이동휘는 곧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했다.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방략이 기존의 외교론에서 무장투쟁론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간도와 연해주의 여러 독립군 부대들을 통합하여 단일한 대군단을 편성할 필요가 있었다. 홍범도가 북간도로 간 근본적인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보인다. 즉 이동휘는 상해에서 독립전쟁을 선포하고, 이동휘는 독립전쟁을 수행할 대규모 통합부대를 조직하는 것으로 역할분담이 이루어졌다고 판단된다. 1950년대 소련에 살고 있던 항일혁명가들 중 1920년대 초 북간도에서 활약했던 이들의 회고들 속에서 우리는 위 결론을 확인시켜주는 단편적 언급들을 찾을 수 있다. 이들은 홍범도가 이동휘와 의논을 하고 북간도로 왔다는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가 홍범도가 진행한 독립군부대 통합의 과정에서 일어났던 승리였음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이 통합의 노력이 실제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 바로 ‘제1기 독립군운동’이 실패로 끝났다는 평가로까지 나아갔다. 그 실패의 원인은 자신들의 기득권 때문에 진실한 통합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던 독립군부대 지휘관들 때문이었다고 평가하였다. 이는 소련시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설명하는 일반적 평가방식이었다고 생각된다. 소련이 붕괴하고 난 후 러시아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대한 평가는 개별 연구에서는 찾기가 매우 힘들다. 다만 러시아의 주요 대학에서 사용하는 교재를 분석하면 그 평가가 소련 시대와는 매우 달라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러시아의 대학교재에 나온 내용은 대부분 현지에서 이루어진 연구의 결과라기보다는 한국에서 진행된 연구성과들을 번역하여 기재된 것으로 판단된다. 때문에 제한적이나마 연구가 이루어졌던 소련시대보다 오히려 퇴행한 평가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경우 러시아에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올바른 평가를 유도하기 위한 방안이 모색될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 스스로 간도와 연해주를 하나의 공간으로 바라보고 그 속에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위치시키는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이러한 연구를 우리들 내부에서만 유통시키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의 한국학 연구자들과의 다양한 교류를 통해 러시아의 한국사 연구 안으로 틈입시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영문 초록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reveal how to evaluate battles of Bongodong and Cheongsanni, which were carried out by Hong Beomdo, in the Soviet Union and Russia. It was in October 1919 that Hong Beomdo has passed to North Kando with his troops from Maritime province in Russia. At that time Lee Donghwi was appointed as Prime Minister of the united Republic of Korea Provisional Government and major activities of Korean Socialist Party moved to Shanghai. As soon as Lee Donghwi arrived in Shanghai, he declared 1920 as the ‘first year of the War of Independence.’ And in order to do this it was necessary to integrate the various units of independence forces troops in Kando and Maritime province, to organize a single army. The fundamental purpose was seemed to be right here for long Beomdo to pass to North Kando. In the Soviet era it was common evaluation that the exercise of the unification all armed forces has failed. The cause of the failure was evaluated because independent military commanders did not want the true integration due to their vested interests. This evaluation was the same in battles of Bongodong and Cheongsanni. In Russia after the Soviet Union collapsed, it is hard to find the evaluation battles of Bongodong and Cheongsanni in the individual studies. We can find it only in history textbooks in Russian universities. However, The contents on college textbooks is judged to the Russian translation of research results, which were conducted in Korea, rather than the results of a study made in Russia.

목차

Ⅰ. 머리말
Ⅱ. 독립운동가의 회고에 나타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1. 이인섭 수집 회고록들
2. 김승빈 수고
Ⅲ. 소련 시기 역사연구에 나타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1. 소련 시기 역사연구
2. 러시아 대학교재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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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Yun, Sang-won). (2015).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대한 소련과 러시아의 평가. 역사문화연구, 56 , 89-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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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Yun, Sang-won).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대한 소련과 러시아의 평가." 역사문화연구, 56.(2015): 89-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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