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검색어

실시간 인기 검색어

학술논문

淸佛戰爭 전후(1883~1885) 臺灣 地域政治의 構造

이용수 244

영문명
발행기관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저자명
문명기
간행물 정보
『역사문화연구』제24집, 289~342쪽, 전체 54쪽
주제분류
인문학 > 역사학
파일형태
PDF
발행일자
2006.06.30
9,280

구매일시로부터 72시간 이내에 다운로드 가능합니다.
이 학술논문 정보는 (주)교보문고와 각 발행기관 사이에 저작물 이용 계약이 체결된 것으로, 교보문고를 통해 제공되고 있습니다.

1:1 문의
논문 표지

국문 초록

淸佛戰爭의 후속 조치로서 光緖11(1885)년부터 시작된 소위 臺灣新政은 洋務運動期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흔히 洋務運動의 일환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여타의 洋務事業과 달리 臺灣新政은 臺灣의 전략적 위상의 제고에 동반한 행정체계의 재편, 즉 建省을 동시에 추진했다는 점을 특징으로 한다. 근대적 방어체계의 수립, 그리고 巡撫權力의 탄생과 府縣의 增設 등의 대대적인 행정조직의 개편을 포함하는 臺灣新政은 당연히 이전의 臺灣道 체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재정적 수요를 발생시켰지만, 정작 중앙정부의 재정 지원은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따라서 원활한 재정 확보를 위해서는 臺灣 紳士層의 정치·경제적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臺灣事件(1874)의 善後策의 하나로서 建省이 논의된 적도 있지만, 역시 중앙정부로부터의 재정 지원의 부족과 協餉 調達시 省間의 비협조에 대한 우려로 인해 지속적인 선후 조치를 행할 수 없었다. 淸朝는 臺灣事件을 통해 臺灣의 군사적·전략적 위상을 再認識하게 되긴 했지만 재정 확보에는 소극적이었고, 결국 臺灣의 建省은 청불전쟁이라는 제2의 충격을 기다려야 했다. 다만 淸佛戰爭 직후에도 청조의 재정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청조 중앙은 淸佛戰爭이 준 충격으로 인해 臺灣의 建省을 결정하기는 했지만 재정 지원에는 여전히 소극적이었고, 결국 初代巡撫 劉銘傳은 ‘以臺灣之財, 供臺灣之用’, 즉 재정의 현지 조달을 적극적으로 강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현지 조달 구상은 臺灣의 지역 경제가 1860년대 開港에 동반한 서양·대륙 자본의 流入과 臺灣中北部 지역을 중심으로 한 茶·樟腦 産業의 비약적인 성장이라는 상황과 맞물리면서 그 실현가능성은 충분해 보였다. 단 단기간에 대규모의 재정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臺灣 社會 내에서의 경제적 이해관계의 대폭적인 조정이 불가피했고, 따라서 臺灣新政의 成敗는 급격한 재정 수요의 팽창에 따른 사회적 긴장·갈등 관계를 어떻게 조정하는가에 달려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때 중요한 사회계층으로 등장한 것이 토착적인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던 現地 紳士層이다. 따라서 초대순무 유명전이 현지 신사층과 어떤 관계를 맺어나갔는가, 그리고 충분히 예상되는 현지 신사층과의 마찰을 어떻게 해결해나가려 했는가, 하는 문제는 원활한 재정 조달을 위해서도, 그리고 國家權力의 臺灣 지역사회에의 ‘軟着陸’을 위해서도 관건적인 문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초대순무 유명전의 赴任 以前부터 (특히) 南部 신사층과의 관계는 그리원만치 못하게 출발했다. 淸佛戰爭 과정에서 軍餉의 分配와 指揮系統 문제를 둘러싸고 순무 유명전과 臺灣道 劉璈간에 발생한 소위 ‘二劉之爭’은 남부 신사층과 유명전의 갈등을 반영한다. 淸佛戰爭 이전 臺灣 民政·軍政의 최고 책임자였던 臺灣道 劉璈는 左宗棠 등 湘系의 정치적 지원 하에서 臺灣 내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 배후에는 米穀과 糖業에 기반해 성장한 남부 신사층의 지원이 자리잡고 있었다. 淸佛戰爭이 발발하자 청조는 捻軍·太平軍 진압의 명장 유명전(淮系)을 臺灣 방어의 최고사령관에 임명했고 유명전은 프랑스군의 주된 전략 목표였던 基隆과 臺北 지역을 담당하고 台南 등 남부 지역의 방어를 劉璈에게 일임하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二劉간에는 정치 계파의 차이로 인한 갈등은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당시 劉璈가 장악하고 있던 臺灣 軍餉의 분배 방식과 臺灣 방어의 우선순위(남부냐 북부냐)를 둘러싸고 대립하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는 프랑스군의 臺灣 봉쇄 조치에 대해 劉璈가 (직속 상관인) 유명전과 어떠한 협의도 없이 곧바로 중앙 정부와 협의하여 봉쇄 조치를 해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유오의 행동은 프랑스군을 자극해 오히려 臺灣 봉쇄에서 한 발 더 나아가 基隆 占領을 시도했다. 비록 기륭 함락 후 곧바로 회복하기는 했지만 유명전은 기륭 失陷으로 인해 朝廷으로부터 그 군사적 능력을 의심받게 된다. 결국 林朝棟을 대표로하는 中部 紳士와 林維源을 대표로 하는 北部 紳士의 적극적인 협조 하에 군사적 난국을 타개한 유명전은 전쟁이 일단락된 후 조정에 유오를 彈劾했다. 때마침 유오의 정치적 後見人 좌종당이 사망함에 따라 湘系의 조정 내에서의 영향력은 급속히 약화되어 결국 유오에 대한 탄핵이 결정되고 만다. 오랜 기간의 관직 경력과뛰어난 政績을 고려해볼 때 (보고 계통을 무시한) 유오의 행동은 일견 이해하기쉽지 않지만, 유오와 상계의 정치적 결합과 남부 신사층의 이해를 대변해온 유오의 정치 편력은 二劉之爭 이해의 단서를 제공해준다.

영문 초록

作爲中法戰爭的善後措施,從光緖11(1885)年開始的臺灣新政,由於是在洋務運動時期進行的,因而被理解成爲洋務運動的一環.但是,與其他的洋務事業不同的是,臺灣新政包含著提高臺灣戰略性位置的行政體系的改編,具有在‘建省’同時推 進的特徵.包括近代防禦體系的樹立與巡撫權力的誕生,以及府縣的增設等大規模行政組織的改編,因此理所當然帶來了與之前‘臺灣道’體系不能相比較的財政需求,而實際上中央政府的財政支援卻微不足道. 因此,爲了確保暢通的財政,不得不向臺灣 紳士階層提出政治和經濟上的協助. 事實上,作爲臺灣事件(1874)善後政策之一的‘建省’也曾經被提起過,但是考慮到中央政府財政支援的不足和協餉調配時各省之間的不合作,而最終沒有被採納.淸朝雖然通過臺灣事件重新認識了臺灣的軍事和戰 略重要性,但是消極的對待財政問題,因此臺灣的建省不得不等到‘第二次衝擊’(中法戰爭)之後了. 中法戰爭之後,淸朝的財政狀況仍然沒有任何改善.淸朝中央因爲中法戰爭所帶來的衝擊,決定建立臺灣省,但仍然消極的對待財政上的支援,這就導致了首任巡撫劉銘傳不得不採取‘以臺灣之財,供臺灣之用’的政策.這種就地籌款的設想,隨著1860年臺灣開港而流入的西洋大陸資本,以及以臺灣中北部爲中心的茶·樟腦産業飛躍性增長的情況相稱,充分的展示了其可實現性.但是,爲了調配持續性·大規模的財政,就不可避免的要調整臺灣社會內部各種經濟利害關係,因此臺灣新政成敗的關鍵,就是如何調整由於急劇膨脹的財政需要引起的社會緊張·矛盾關係. 此時期登場的重要社會階層就是保留著地方勢力的當地紳士階層. 因此,首任巡撫劉銘傳如何與當地紳士結交,幷且如何解決已經充分預測到的摩擦,這些問題不僅僅爲了財政的順利調配,更關鍵的是爲了解決國家權力如何在臺灣地區社會的‘軟著陸’.但是在首任巡撫劉銘傳赴任之前,(特別是)與南部紳士階層的關係出發得並不圓滿. 中法戰爭的過程中,圍繞著軍餉的分配和指揮系統的問題,巡撫劉銘傳和臺灣道劉璈之間發生的所謂‘二劉之爭’,充分反映了南部紳士階層和劉銘傳的矛盾.中法戰爭之前曾經是臺灣民政·軍政最高負責人的臺灣道劉璈在左宗棠等湘係的政治支持 下,在臺灣內保持著相當的政治影響力,其背後得到了以米穀和糖業爲基礎而成長的南部紳士階層的支援. 中法戰爭爆發不久,淸朝任命鎭壓捻軍·太平軍有功的名將劉銘傳(淮係)爲督辦臺灣事務,負責法軍主要戰略目標的基隆和臺北地區,台南 等南方地區的防禦則由劉璈來擔當. 在這段期間,也並沒有顯示出二劉之間因爲政治派系的不同所引起的矛盾. 但是,圍繞當時劉璈所掌握的臺灣軍餉分配方式和臺灣防禦優先順序(南部還是北部)的問題,發生了對立,而起到決定性因素的是法軍對 臺灣實施的封鎖政策,劉璈並沒有劉銘傳(直屬相關上級)相商議,而是直接與中央政府進行協議以期待解除封鎖政策.劉璈的行動刺激到法軍,不僅封鎖了臺灣進而試圖占領基隆. 儘管基隆淪陷后馬上收回,但是劉銘傳由於基隆的失陷讓朝廷對其軍 事能力産生了懷疑.結果在林朝棟代表的部紳士和林維源代表的北部紳士積極的配合下,突破了軍事上難局的劉銘傳在戰勢平穩之後向朝廷提出彈劾劉璈的建議. 正好此時在政治上給予劉璈支持的左宗棠去世,使得湘係在朝廷內部的影響力急劇下 降,劉璈也因此被彈劾了.雖然不是正途出身,從長期的仕途經歷和卓越的政績來看,劉璈無視報告系統的行動似乎不太容易被理解,但是劉璈與湘系在政治上相結合成爲南部紳士利害關係的代辯人,劉璈的政治歷程爲理解二劉之爭提供了線索. 南部紳士階層主要經濟依據是糖業,在1880年代開始陸續的出現了競爭地區(印尼的爪哇,古巴等中南美),因此出口量急劇減少,陷入了嚴重的經營困境. 由於中法戰爭中法軍對臺灣的封鎖措施,幾乎全部依靠糖出口的南部紳士階層受到了極其不利的影響.這樣,南部紳士階層接近與他們有著緊密政治關係的劉璈,讓他向法國以外的列强抗議,試圖解除封鎖措施.劉璈相信左宗棠和楊昌濬(閩浙總督)等政治上的支援,無視上報順序試圖獨自的解除封鎖臺灣的措施,但卻以失敗告終,劉銘傳在戰後沒有放過這一切. 二劉之爭的結果導致了南部紳士階層喪失了自身的政治基礎,對於此事件的元兇劉銘傳,形成了强烈的政治反對勢力. 就任巡撫之後,劉銘傳的各種政策主要以臺北基隆等北部爲主,這樣更加速了南部紳士階層對於巡撫權力的反對. 劉銘傳著手建省之前開始,就已經喪失了南部地區的政治支持,這一切爲建省的過程(淸賦事業上南部紳士階層極其不合作等)帶來不小的負擔. 總之,如果描繪二劉之爭的草圖的話,就是湘係(左宗棠)劉璈(臺灣道)南部紳士 vs .淮係(李鴻章)劉銘傳(巡撫)中北部紳士的對立和矛盾所造成的結果.

목차

Ⅰ. 序論
Ⅱ. 淸佛戰爭과 鎭道體制의 變化
Ⅲ. 淮湘對立과 二劉之爭
Ⅳ. 二劉之爭과 地域政治
Ⅴ. 結論

키워드

해당간행물 수록 논문

참고문헌

교보eBook 첫 방문을 환영 합니다!

신규가입 혜택 지급이 완료 되었습니다.

바로 사용 가능한 교보e캐시 1,000원 (유효기간 7일)
지금 바로 교보eBook의 다양한 콘텐츠를 이용해 보세요!

교보e캐시 1,000원
TOP
인용하기
APA

문명기. (2006).淸佛戰爭 전후(1883~1885) 臺灣 地域政治의 構造. 역사문화연구, 24 , 289-342

MLA

문명기. "淸佛戰爭 전후(1883~1885) 臺灣 地域政治의 構造." 역사문화연구, 24.(2006): 289-342

결제완료
e캐시 원 결제 계속 하시겠습니까?
교보 e캐시 간편 결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