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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法 시행 이전의 王安石과 그 행적

이용수 719

영문명
발행기관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저자명
이근명(李瑾明)
간행물 정보
『역사문화연구』제34집, 311~338쪽, 전체 28쪽
주제분류
인문학 > 역사학
파일형태
PDF
발행일자
2009.10.30
6,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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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문의
논문 표지

국문 초록

王安石은 38세 되던 해인 1058년 江東路 提點刑獄으로부터 中央으로 불리워져 三司度支判官에 임명된다. 그는 이전까지 거듭된 중앙의 발탁에도 불구하고 모두 固辭하고 지방관으로 轉轉하고 있었다. 그러던 王安石이 모처럼 중앙관을 수락하고 조정에 나아가면서 올리는 復命書가 바로 <萬言書>였다. <萬言書>는 왕안석의 詩文 가운데 대표적인 名文의 하나로 꼽힌다. 萬餘 字에 가까운 長文이면서도 지루하거나 重複되지 않고, 기백과 힘이 넘치는 어조로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논의를 진행시키기 때문이다. 이 상주문에서 말하는 要諦는, 당시 체제위기의 본질은 人才의 부족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 인재의 부족은 先王의 法度를 채용하지 않은 데 있으며, 先王의 法度란 인재의 ‘敎之(교육),養之(처우), 取之(선발), 任之(임용)’의 네 측면에서 집약적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결국 북송중엽 당시의 문제는, 인재에 대한 교육, 처우, 선발, 임용의 네측면을 본질적으로 개혁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왕안석은 이러한 논조를 기본으로 하면서, 이에 덧붙여 理財의 문제라든가 국방의 문제, 정치구조의 문제 등에 대해 광범위하게 論及해간다. 그러면서도 논의의 초점인 인재양성의 문제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만언서>가 만여자에 육박하는 장문이면서도 간결하고 강렬한 어조를 띄고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왕안석은 <만언서>를 올리고 나서 얼마 후 또 하나의 대표적인 문학 작품을 발표한다. 유명한 <明妃曲>이 바로 그것이다. 이 시의 소재가 되는 明妃는 前漢 말기 匈奴의 單于에게 시집간 王昭君이다. <명비곡>은 왕소군을 소재로 한 뭇 문학작품 가운데 가장 문학성이 뛰어난 것의 하나라는 평판을 받고 있다. 실제로 <명비곡>이 발표되자 歐陽脩, 劉敞, 司馬光, 梅堯臣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문인들이 다투어 그것에 답하는 시(唱和詩)를 지었다. <명비곡>은 훗날 몇 차례 논란의 대상이 된다. 특히 남송초에는 范沖이 극렬한 어조로 그 안에 내포된 사상의 잘못을 비난하였다. 왕안석의 행적이나 문학 작품 가운데, 정치적 환경의 변화에 따라 평가가 굴절되어 가는 것이 적지 않다. 新法에 대한 반대가 치열해 지면서, 이전까지 찬사를 받던 것들이 급전직하하여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명비곡>은 그러한 사례의 대표 가운데 하나이다. 왕안석이 중앙관으로 근무한 기간은 약 4년이었다. 그 사이 그는 三司度支判官, 知制誥 등을 역임하였다. 1063년 모친이 작고하자, 그는 服喪을 위해 金陵으로 낙향하였다. 복상을 마치고 나서도 그는 중앙관으로 복귀하지 않았다. 그는 금릉에 그대로 남아, 한편으로 저술을 하며 또 한편으로 제자들을 가르치는 생활을 해 나갔다. 그가 재차 조정에 나서는 것은 그로부터 다시 3년여가 지난 1068년의 일이었다.

영문 초록

王安石在38歲的1058年, 從江東路提點刑獄召到中央被任命爲三司度支判官。王安石雖然曾經多次提拔爲中央官, 但是堅決推辭而流轉爲地方官員。 那樣的王安石特意接受中央官職而前往朝廷時, 上的復命書就是<萬言書>。<萬言書>是當王安石的詩文中, 最具有代表性的名文之一。 其原因是, <萬言書>雖然至於萬餘字的長文, 但是不煩瑣而不重複, 利用很有氣概和力氣的語調, 維持非常緊張的感覺而進行論議。 這道上奏文所說的要諦是, 當時統治危機的本質在于人才不足。 進而, 如此形成人才不足情況的原因在于不採納先王之法度, 先王法度集中出現於“敎之、養之、取之、任之”等四個側面。 因此, 當北宋中期時的問題, 對於人才敎育、待遇、選拔、任用等四方面的根本性改革之後, 才能解決。 王安石在這種論調的基礎上, 再加廣範涉及了理財或者國防以及政治構造等問題。 與此同時, 還不太脫離論議焦點的人才培養問題。 <萬言書>雖然是近一萬餘字的長文,但表現出簡潔而強烈語調的原因, 就在這兒。王安石上<萬言書>之後, 再一次發表了保有代表性的文學作品。 這就是非常有名 的<明妃曲>。 作爲這首詩素材的明妃是在西漢末期嫁給匈奴單於的王昭君。 <明妃曲>受到把王昭君作素材的許多文學作品中文學性最高文學作品之一的評價。 實際上, 在<明妃曲>發表後, 歐陽脩、劉敞、司馬光、梅堯臣等當代可以稱得上是大腕兒的 文人們, 都作過唱和詩。後日, <明妃曲>幾度成爲爭論的焦點。 特別是在南宋初, 範沖而極烈的語調來批判了在<明妃曲>內含的思想上錯誤。 衆所周知, 王安石的行迹或者文學作品中, 隨著政治環境的變化, 不少有對它評價的曲折。 對新法的反對越來越激烈, 曾經受到很高評價的東西, 也急轉直下, 突然變成爲批評的對象。 <明妃曲>就是最明顯的一個例子 王安石以中央官在職期間, 大約有四年餘時間。 在這四年多時間中, 他曾經歷任過三司度支判官、知制誥等職。 在1063年, 母親去世後, 他爲了服喪, 回去了金陵。他在脫喪後, 也沒有立刻作爲中央官。 他仍然留在金陵, 一邊埋頭著述, 另一邊敎學生而生活下去。 然後, 他再一次向朝廷的是, 從此過三年時間的1068年的事了。

목차

Ⅰ. 머리말
Ⅱ. <만언서>의 상주
Ⅲ. <명비곡>과 이를 둘러싼 논란
Ⅳ. 5년에 걸친 중앙관 생활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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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명(李瑾明). (2009).新法 시행 이전의 王安石과 그 행적. 역사문화연구, 34 , 31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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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명(李瑾明). "新法 시행 이전의 王安石과 그 행적." 역사문화연구, 34.(2009): 31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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