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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 挹婁의 이탈과 夫餘의 쇠퇴

이용수 107

영문명
The Breakaway of Yilou(挹婁) and the Decline of Buyeo(夫餘) in the 3rd Century
발행기관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저자명
이승호
간행물 정보
『동국사학』제64권, 293~331쪽, 전체 39쪽
주제분류
인문학 > 역사학
파일형태
PDF
발행일자
2018.06.30
7,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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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문의
논문 표지

국문 초록

본 논문은 3세기 무렵 부여의 국세 변동에 대한 분석을 통해 285년 모용선비와의 전쟁 당시 부여가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채 갑작스레 붕괴하게 된 대내외적 요인을 검토한 것이다. 먼저 본고에서는 부여에 臣屬해 있던 읍루가 220년대에 이탈한 사실에 주목하였다. 이 사건이 가지는 의미를 보다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 3세기 초 이전까지 부여와 읍루의 관계에 대해 살펴본 결과, 당시 牧丹江 유역과 연해주 일대에 거주하였던 읍루의 일부 세력은 부여에 臣屬한 상태에서 부여를 통해 외부 세계와 소통하고 교역 또한 진행하였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즉 3세기 초까지 부여는 敦化 방면으로 구축된 교통로를 바탕으로 두만강 유역 북쪽의 북옥저 일부 지역과 牧丹江 유역 및 연해주 남부 일대의 읍루 일부 세력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3세기 전반 무렵 읍루가 부여의 영향력 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고구려의 북옥저 지방 진출과 읍루 사회의 자체적 역량 증대를 지적하였다. 2세기 무렵부터 부여 남쪽에서 급격히 세력을 확대해가며 두만강 유역 진출에 성공한 고구려의 존재는 부여가 읍루와 북옥저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에 큰 장애로 작용하였다. 또한 3세기에 들어서면서 읍루 사회 내부에서도 정치적 결집이 이루어지고 자체적 역량이 확대되어 갔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읍루가 부여로부터 이반하면서 3세기 전반 무렵 부여는 張廣才嶺 이동 지역과 북옥저 일대에서 누리던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3세기 무렵 遼東의 정세 변화와 모용선비 세력의 동향을 주목하면서 당시 부여의 내부 정치 상황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부여의 동쪽 방면이 허물어져가던 3세기 전반 서쪽으로부터는 모용선비가 세력을 확장해가며 부여를 압박하였고, 남쪽에서는 고구려가 부여의 강력한 경쟁자로 떠올랐다. 당시 부여왕 麻余는 선왕 簡位居의 蘖子로 諸加들의 도움에 의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따라서 麻余의 왕권은 상당히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 부여의 정치적 실권이 大使 位居에 의해 장악되었던 정황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大使 位居와 牛加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지는 등 정국의 혼란이 이어지는 한편, 왕 麻余 마저도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 결과 부여의 중앙에서는 지배층의 분열과 이탈 현상이 심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이는 ‘諸加가 自戰하는’ 부여의 전통적인 방어체계가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던 원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으로 판단하였다. 부여가 쇠락하게 된 결정적 배경은 285년 벌어진 모용선비의 침공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 이면에는 3세기 전반부터 안팎으로부터 붕괴되어 가던 부여의 대내외적 정치 상황이 자리하고 있었다.

영문 초록

This study examines the cause of Buyeo(夫餘)’s sudden collapse in the war with Murong Xianbei(慕容鮮卑) in 285. First of all, it should be noted that in the early 3rd century, Yilou(挹婁) broke away from Buyeo’s sphere of influence. The reasons Yilou was able to gain independence from Buyeo were Goguryeo(高句麗)’s advance to North-Okjeo(北沃沮) and the growing capacity of Yilou itself. Buyeo’s influence, on the other hand, was weakened in North Okjeo and it gradually lost its influence on Yilou. Next, this study paid attention to the political changes in Liaodung(遼東) and the movement of Murong Xianbei in the 3rd century. Along with this, it examined the internal political situation of Buyeo at the time. In the early 3rd century when the eastern Buyeo was collapsing, Murong Xianbei was expanding its forces in the western Buyeo. Also, in the south of Buyeo, Goguryeo was expanding its influence and pressed Buyeo. Around this time, the power of King Mayeo(麻余) was weak, and the one with actual authority was Daesa(大使) Wuigeo(位居). In the middle of the 3rd century in Buyeo, the political situation was chaotic with the power struggle between Daesa Wuigeo and Cow-Ga(牛加). During this chaos, King Mayeo died a questionably death. As a result, the ruling class was divided in the central political system of Buyeo, and more of the ruling class broke away. This became a reason why Buyeo’s traditional defense system, where Several Ga(諸加) themselves participated in the war, did not function properly. The critical cause in the collapse of Buyeo in the late 3rd century was the invasion of Murong Xianbei in 285. Behind it, however, was the political situation of Buyeo that collapsed on the inside and outside.

목차

Ⅰ. 머리말
Ⅱ. 挹婁의 이탈과 夫餘 東方 세력권의 붕괴
Ⅲ. 3세기 遼東의 정세와 夫餘 쇠퇴의 내부 요인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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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호. (2018).3세기 挹婁의 이탈과 夫餘의 쇠퇴. 동국사학, 64 , 293-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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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호. "3세기 挹婁의 이탈과 夫餘의 쇠퇴." 동국사학, 64.(2018): 293-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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