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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와 시문에 나타난 성균관의 재건과 유풍(儒風)의 일신(一新)

이용수 17

영문명
The reconstruction of Sungkyunkwan and the renewal of Confucianism as revealed in historical records and poetry
발행기관
포은학회
저자명
강지희
간행물 정보
『포은학연구』제32집, 33~67쪽, 전체 35쪽
주제분류
인문학 > 기타인문학
파일형태
PDF
발행일자
2023.10.31
7,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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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문의
논문 표지

국문 초록

공민왕의 시대는 원나라의 간섭, 여진족의 침입, 명나라의 등장, 홍건적의 난, 왜구의 출몰 등으로 인해 매우 혼란한 시기였지만, 공민왕의 개혁 의지와 신돈의 개혁 정책, 신진 사류의 사상적인 뒷받침, 무장(武將)들의 분투(奮鬪)에 힘입어 많은 변화와 진전이 있기도 했다. 제2차 홍건적의 침입으로 성균관이 불에 탄 후 국학은 잠시 쇠락한 듯했지만 1367년 숭문관 터에 중영되고 나서는 유풍(儒風)이 일신되는 일대의 전환기를 맞이했다. 이는 공민왕의 교육에 대한 관심과 개혁을 향한 적극적인 태도, 목은·포은을 비롯한 유자들의 수준 높은 학문 성취와 교육에 대한 열정이 혼연일체가 되어 빚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목은 이색의 경우 국학생에게만 과거 응시 자격을 줄 것을 건의하였고, 1367년 성균관대사성으로서 학관들을 선발하였으며, 전국에서 학자들을 모아 경서를 학습하고 매일 강의가 끝나면 의심나는 부분을 토론하여 성리학을 부흥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동방 이학의 조종’이라 불린 포은 정몽주는 성리학 연구와 교육에 있어서 빛나는 활약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상례와 제례에 있어서 처음으로 주자의 『가례』를 따라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으며, 이것이 이후 조선시대 가례의 전범이 되었다. 이 외에도 박상충·박의중·김구용·이숭인·이인복 등도 성균관 재건과 성리학의 부흥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하였다. 박상충은 향사의 체제를 바로잡기 위해 옛날의 의례를 참고하고 고증하여 향사의 전범이 되는 문서를 손수 만들었다. 박의중은 도덕과 문장에 있어서 당세의 으뜸이었으며 성균관의 다른 학관들과 더불어 유생들을 훈도함으로써 세교에 많은 공을 세웠다. 척약재 김구용은 그의 삶과 인품이 담긴 한시를 남겨 그가 지닌 유자(儒者)의 풍모를 드러내었고, 이숭인은 동료 교관들과 매일 경전을 나누어 수업하고 정주(程朱)의 글을 강론함으로써 성리학을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초은 이인복 역시 과거의 지공거를 맡아 성리학으로 무장한 인재들을 다수 발탁하였으며, 역사서 편찬에도 많은 업적을 남겨 그 공이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인물들의 활약을 바탕으로 성리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유생들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과거시험을 통해 유수한 문인 학자와 관료들이 배출되었던 상황을 떠올려본다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정주학(程朱學)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대체로 공민왕 대의 국학 체제를 유지하였다는 사실은 당시의 성균관 재건과 교육 체제의 정비가 상당히 체계적이었음을 방증한다. 또한 성균관이 여말선초의 관료로서 역사에 이름을 뚜렷하게 남긴 수많은 인재들을 키워낸 산실임을 감안한다면 재건된 성균관의 위상은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영문 초록

The era of King Gongmin was a very chaotic time due to the intervention of the Yuan Dynasty, the invasion of the Jurchen people, the emergence of the Ming Dynasty, the Red Turban Rebellion, and the emergence of Japanese enemies.However, on the other hand, there were many changes and developments thanks to the reforms of King Gongmin and Shin Don, the ideological support of new scholars, and the struggles of military commanders. After Sungkyunkwan burned down during the second Red Turban invasion, national studies seemed to decline for a while, but after it was rebuilt at the site of Sungmungwan in 1367, it entered a turning point in which Confucianism was renewed.This can be said to be the result of the combination of King Gongmin's interest in education and his active attitude toward reform, and the high-level academic achievements and passion for education of Confucian scholars, including Mok-eun and Poeun. Mok-eun(Lee Saek) suggested that only Korean students be eligible to take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and in 1367, he selected academic officials as the Sungkyunkwan Daesaseong and gathered scholars from all over the country to study scriptures and discuss doubtful parts after lectures every day to revive Neo-Confucianism. Poeun(Jeong Mong-ju), who was called the ‘master of Eastern Neo-Confucianism,’ played a brilliant role in the research and education of Neo-Confucianism. In addition, he was the first to build a shrine and hold ancestral rites according to Zhu Xi's Garye in funeral rites and ancestral rites, and this became the model for ancestral rites during the Joseon Dynasty. In addition, Park Sang-chung, Park Eui-jung, Kim Ku-yong, Lee Sung-in, and Lee In-bok also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the reconstruction of Sungkyunkwan and the revival of Neo-Confucianism. In order to correct the system of ancestral rites, Park Sang-chung referenced and researched ancient rituals and personally created a document that served as a model for ancestral rites. Park Ui-jung was the best of his time in terms of morals and writing, and he contributed a lot to the world by teaching Confucian students along with other academics at Sungkyunkwan. Kim Gu-yong left behind Chinese poems containing his life and personality, revealing his Confucian character, and Lee Sung-in played an important role in spreading Neo-Confucianism by sharing scriptures with his fellow instructors every day and lecturing on Jeong Ju's writings. Lee In-bok also took charge of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selected many talented people armed with Neo-Confucianism, and left many achievements in compiling history books, so his contribution can be said to be considerable. Based on the activities of these figures, the number of Confucian students who wanted to study Neo-Confucianism rapidly increased, and leading literary scholars and officials were produced through civil service examinations. From this time on, Jeongju studies began to take root in Korea. It would not be an exaggeration to say this. The fact that the national education system of King Gongmin's reign was generally maintained even into the Joseon Dynasty proves that the reconstruction of Sungkyunkwan and the maintenance of the education system at that time were quite systematic. In addition, considering that Sungkyunkwan was the birthplace of many talented people who left their names in history as officials of the late Goryeo Dynasty and early Joseon Dynasty, the status of the rebuilt Sungkyunkwan has even greater significance.

목차

1. 서언
2. 사료와 시문에 나타난 성균관의 재건과 유풍(儒風)의 일신((一新)
3. 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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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희. (2023).사료와 시문에 나타난 성균관의 재건과 유풍(儒風)의 일신(一新). 포은학연구, (), 3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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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희. "사료와 시문에 나타난 성균관의 재건과 유풍(儒風)의 일신(一新)." 포은학연구, (2023): 3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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