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초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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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문명
- A Study on the cursive of the Lee San-hae in A-gye
- 발행기관
- 한국서예학회
- 저자명
- 정주하(Jeong, Ju-ha)
- 간행물 정보
- 『서예학연구』서예학연구 제37호, 127~149쪽, 전체 23쪽
- 주제분류
- 예술체육 > 예술일반
- 파일형태
- 발행일자
- 2020.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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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이산해는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상황에 영의정이라는 최고 중책의 자리에서 선조의 어가가 파천(播遷)하게 되자 묘사(廟社)를 모시며 호위했던 인물로, 군국(軍國)의 방책을 여러 차례 개진한 충의(忠毅)를 가진 인물이다. 또한 선조 때 ‘문장팔가(文章八家)’의 한 사람으로 칭송받았으며, 8년 동안 ‘문형(文衡)’을 맡으며 당대 조선의 문풍(文風) 이끌었을 정도로 시문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때문에 이산해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그의 시와 문학 및 사상에 관한 것들에 편향되어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6세에 이미 ‘서소문자대필’이라고 언급될 정도로 글씨로 명성을 떨쳤으며, 24세에는 명종의 명에 의해 경복궁의 편액 글씨를 쓸 정도로 명필로서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과소평가 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산해의 학문은 가풍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집안의 어른들로부터 상당한 교육을 받았는데, 이 가운데서도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바로 숙부 이지함이다. 때문에, 먼저 이지함에 대하여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이지함은 조선시대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그러했듯이 기본적으로 성리학자이였지만, 스승인 서경덕의 학풍과 마찬가지로 의(義)와 이(利)를 함께 중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곧, 기존의 통설에만 집착하지 않고 상황에 맞는 유연하고도 실용적인 대처를 추구하는 개방적이고도 현실적인 사상을 견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화담학파에게서 가장 두드러진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도가적이면서 실용을 중시한 화담학파의 사상은, 이산해에게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이산해의 여러 묵적들 가운데서 초서 묵적들을 살펴보았는데, 이는 초서가 다른 서체들 보다 그의 개방적이고 실용적인 성향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초서풍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그대로 반영되었는데, 유년기부터 영향을 받았던 장필의 광초풍과 더불어 축윤명, 황산곡, 그리고 황기로의 대자초서풍을 재해석하여 구애받지 않고 정감을 자유롭고 유려하게 풀어낸 초서 풍격을 구사하였다.
영문 초록
Lee San-hae was a loyal retainer of the king in the position of chief executive in the national crisis of Imjin Waeran.“ He was also praised as a member of the Moonjang Palga during the reign of King Seonjo, and was an outstanding writer for eight years, leading the literary style of the Joseon Dynasty. Therefore, most of the research on Lee San-hae is biased towards his poems, literature and ideas. However, it is relatively underestimated that the handwriting was already noted as Seosomunjadaepil at the age of six, and was recognized as a master calligrapher at the age of 24 by King Myeongjong to write the Pyeonaek of Gyeongbokgung Palace.
Lee San-hae s studies were greatly influenced by family customs. In particular, he received considerable education from the elders of the family from his childhood, and the most influential person among them was his uncle Lee Ji-ham.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first find out about Lee Ji-ham.
Lee Ji-ham was basically a Neo-Confucianist, as most of the aristocrats did during the Joseon Dynasty, but, like his teacher Seo Gyeong-deok, he values righteousness and Use together. In other words, he maintained an open and realistic idea of pursuing flexible and practical measures that were appropriate to the situation, rather than sticking to conventional wisdom. This tendency can be seen as the most prominent among the Hwadam School. The ideas of the Hwadam School, which is both provincial and practical, will continue to lead to Lee San-hae.
Among the various works of the Lee San-hae, looked at cursive writing because it best reveals his open and practical tendency than other typefaces. This trend was reflected in his cursive which reinterpreted the wild cursive of Jang Pil, which had been affected since childhood, which reinterpreted the large letter cursive of Chuk Yunmyeong, Hwangsangok, and Hwang Gi-ro, to freely and elegantly unravel the feeling.
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이산해의 사상적 배경
Ⅲ. 이산해의 초서풍격
Ⅳ. 나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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