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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滿鮮史와 日本史의 위상

이용수 873

영문명
滿鮮史と日本史の位相 - 稻葉岩吉の硏究を中心で
발행기관
한국사학사학회
저자명
정상우(鄭尙雨)
간행물 정보
『한국사학사학보』제28권, 321~355쪽, 전체 35쪽
주제분류
인문학 > 역사학
파일형태
PDF
발행일자
2013.12.31
7,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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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문의
논문 표지

국문 초록

식민주의 역사학은 일본의 대륙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근대역사학 성립과정에서 일본사를 중심으로 주변민족의 역사를 일본사의 타자로 규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滿鮮史는 일본사를 중심으로 조선과 만주의 역사를 재구성한 것이라 하겠으며, 그렇기 때문에 만선사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그 속에서 일본사의 위상을 고려해야만 한다. 이 논문은 대표적인 만선사학자인 稻葉岩吉의 연구 과정을 통하여 만선사의 체계화 과정과 그 속에서 일본사의 위치를 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조선에 부임하던 1920년대 이전 稻葉은 만선사가라기 보다는 청조사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동북아의 역사를 대륙과 일본의 關係史라는 맥락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가운데 주된 관심을 淸朝와 滿洲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조선 부임과 함께 만주와 더불어 조선과 그 주변을 연구하며 만선의 불가분성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稻葉 역시 당시 일본학계의 풍토가 그러했듯이 주로 古代史 연구에 집중했지만 다른 일본인 학자들처럼 韓日關係 보다는 자신이 이전부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대륙과 조선의 관계를 규명하고자 했다. 당시 稻葉은 民族的ㆍ政治的ㆍ經濟的 측면에서 만선의 불가분을 주장하는 한편 半島에 영향을 준 것은 만몽의 민족보다는 漢族이라며 중국의 영향력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조선의 역사에서 만주보다 중국의 영향력을 중요시하는 것은 만선이 불가분이라던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또 이 시기 만선의 역사를 설명하는 방식은 사료의 해석이라기 보다는 전달에 가까웠고, 조선방면의 민족과 漢族을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으로 조선과 그를 둘러싼 주변의 역사를 어떠한 구조에 입각하여 통일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1920년대 稻葉의 연구는 조선과 그 주변의 관계, 특히 조선에 미친 漢族과 그 문화의 영향력에 대한 것이라 하겠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만선사라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1930년대 들어서는 이러한 양상에서 벗어나 조선과 그를 둘러싼 주변에 대한 통일적인 歷史像을 제시하고자 했다. 稻葉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른바 “全局上 注意”를 기울여 조선의 역사를 동양사의 일부로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단순히 民族 혹은 勢力들 사이의 일대일 대응이 아닌 東胡系 民族, 漢族, 蒙古族의 3자의 세력관계 속에서 사고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조는 契丹이 흥기하고 新羅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만선분리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稻葉 스스로 시인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稻葉 역시 7세기 이후의 역사를 설명할 때는 滿鮮을 통일적으로 사고하기 보다는 漢族의 왕조, 契丹이나 女眞과 같은 북방민족, 半島의 민족 등과 같이 개별적으로 바라보았으며 漢族에 의한 以夷制夷에 따른 滿鮮分離의 과정으로 서술하는 한편 만선의 접촉이 있던 17세기의 역사적 전개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이럴 경우에도 稻葉의 연구는 滿鮮의 불가분성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여 女眞과 朝鮮의 접근을 높게 평가하는 양태를 나타낸다고 하겠다. 오히려 稻葉이 연구 초기부터 말년까지 시종일관 변치 않고 주장했던 것은 동북아시아의 역사적 전개에 있어서 일본의 위상에 관한 것이었다. 연구의 진전에 따라 稻葉은 자신의 주요 연구대상을 淸에서 조선과 그 주변, 만선으로 이동했지만 언제나 대륙과 일본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에 부심했다. 또 연구과정에서 과거 자신의 견해를 부정하기도 하지만 대륙의 영향을 받아 개국과 동시에 强國이 된 일본의 역사적 위상에 대해서는 변치않는 신념을 나타내었다. 1920년대 대륙과 일본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던 측면을 강조하던 稻葉은 1930년대 이러한 논의를 반복하면서도 대륙이 무시할 수 없었던 해양의 강자로서 일본의 위상을 2세기까지 소급하는 한편 그것이 지속되었다는 歷史像을 제시하였다. 일본의 이러한 위상에 대해서는 古代를 넘어 稻葉 자신도 滿鮮分離가 가속화되었다며 자신이 제시한 만선사적 구조로 설명하지 못한 7세기 이후의 역사에도 관철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稻葉이 체계화했던 만선사라는 것은 1930년대에 접어들어 나타나는 것으로 稻葉 스스로 인정하듯이 7세기 이후에는 존재할 수 없는, 오히려 滿鮮分離史라고 하는 것이 실체에 가까운 것이라 하겠다. 또 滿鮮史를 구조화하며 漢族, 蒙古族, 東胡系 民族의 관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가 제시하는 주요한 국면 – 한사군의 설치, 삼국의 각축,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모두 일본의 개국과 해동의 강자로서 일본의 위상을 설명하는 것과도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稻葉이 추구했던 ‘滿鮮史’라는 것은 7세기 이전에 존재했던 것으로,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 역사의 재구성이라

영문 초록

植民主義歷史學は日本の大陸侵掠を合理化するためのものであっただけでなく、日本で近代歷史學の成立過程で日本史を中心に周邊民族の歷史を日本史の他者に規定することだった。このような觀點から見ると、滿鮮史は日本史を中心に朝鮮と滿洲の歷史を再構成したものとしせていただき、そのために滿鮮史に対する理解のためには滿鮮史の中で日本史の位相を考慮しなければならない。本稿は代表的な滿鮮史學者な稻葉岩吉の硏究課程を追跡して滿鮮史の體系化過程とその中で日本史の位置を糾明するためのものである。 硏究初期から淸朝と滿洲の歷史を硏究しながらもそれを大陸と日本の關係史で見た稻葉は1920年代朝鮮に赴任しながら硏究對象を朝鮮とその周邊に變貌させた。当時、日本の学界の研究の風土がそうであったように、彼は主に古代史を硏究したが、別人の学者のように韓日關係に集中するよりは自分が以前から関心を傾けていた大陸と朝鮮の關係を糾明しようとした。当時、稻葉は民族的・政治的・經濟的側面で滿洲と朝鮮の不可分を主張する一方、半島に影響を与えたものは滿蒙の民族よりは漢族とし、中国の影響力を說明した。このように朝鮮の歷史で滿蒙より中国の影響力を重要視することは滿鮮が不可分だと言っていた自身の主張を自ら否定することだった。また、この時期滿鮮の歷史を說明する方式は史料の解釋というよりは傳達に近い、朝鮮方面の民族と漢族を一對一で對應させることで朝鮮とそれをめぐる周邊の歷史をどのような構造に立脚して統一的に解釋することはなかった。つまり1920年代、稻葉の硏究は朝鮮と彼を取り巻く周邊との關係、特に朝鮮に及ぼした漢族とその文化の影響力についたものと言わせていただき、このような意味で滿鮮史としにくいことだった。 しかし、1930年代に入ってからはこのような樣相から脱し、朝鮮とそれをめぐる周邊に対する統一的な歷史像を提示しようとした。稻葉の表現を借りればいわゆる"全局上注意"を傾けて朝鮮の歴史を東洋史の一部として解釈する中で、単に民族あるいは勢力の間の一對一對應がなく東胡系民族、漢族、蒙古族の三者の勢力關係の中で思考することだった。でもこうした構造は契丹が興起して新羅が三國を統一する7世紀以降は滿鮮分離が行われるため、適用不可能ということを稻葉自ら是認している。そのために稻葉も7世紀以後の歷史を敍述する場合においては、滿鮮を統一的に思考するよりは中国の漢族の王朝、契丹や女眞のような北方民族、半島の民族などとように個別的に眺めており、漢族の以夷制夷による滿鮮分離の過程に敍述する一方で、このような秩序が揺らぐ17世紀の歷史的展開について大きな關心を表明した。しかし、この場合にも稻葉の硏究は滿鮮の不可分性を機械的に適用して女眞と朝鮮の接近を高く評価する樣態を示すとする。 むしろ稻葉岩吉が硏究の初期から末年の1930年代まで変わらず主張したのは東北亞細亞の歷史的展開において日本の位相に関するものだった。時間の經過によって稻葉は自身の主要な硏究對象を淸、朝鮮とその周邊、滿鮮に移動したが、いつも大陸と日本の關係を說明するのに腐心した。また硏究課程で過去自身の見解を否定したりするが硏究の初盤から変わらなかったのは大陸の影響を受けて開國と同時に强國になった日本の歷史的位相に関するものだった。1920年代大陸と日本が相互影響を交わした側面を强調した稻葉は1930年代このような論議を反復しながらも大陸が無視できなかった海洋の强者として日本の位相を2世紀まで遡及する一方、それが始終一貫持續なったという歷史像を提示した。日本のこのような位相については古代を超えて稻葉自身も滿鮮分離が加速化なったとし、自身が提示する滿鮮史的構造で說明しなかった7世紀以後の歷史に(元の日本招諭と侵掠、淸朝の興起) 貫徹なることだった。 こうなると、稻葉が體系化した滿鮮史というのは1930年代に入って現れるもので稻葉自ら認定するように7世紀以後には存在できない、むしろ滿鮮分離史というのが實體に近いものといえる。また滿鮮史を構造化して漢族、蒙古族、東胡系民族の關係を說明する過程で、彼が提示する主要な局面 – 漢四郡の設置、三國の角逐、隋唐と高句麗の戰爭はすべて日本の開國と海東の强者として日本の位相を說明することとも連結なっている。このような意味で稻葉が追求した'滿鮮史'というのは7世紀以前に存在したことで、日本を中心とした東北亞細亞の歷史の再構成といえるだろう。

목차

【국문초록】
Ⅰ. 서언 - 일본 근대역사학으로서의 식민주의 역사학
Ⅱ. 稻葉岩吉의 연구과정에서 나타난 ‘滿鮮史’
Ⅲ. 滿鮮史에서 일본의 위상
Ⅳ. 결어
참고문헌
日文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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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우(鄭尙雨). (2013).滿鮮史와 日本史의 위상. 한국사학사학보, 28 , 32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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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우(鄭尙雨). "滿鮮史와 日本史의 위상." 한국사학사학보, 28.(2013): 32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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