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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建의 高麗建國 過程에 있어서 豪族勢力

이용수 1848

영문명
Wang Geon’s Establishment of Koryo and Powerful Family
발행기관
백산학회
저자명
蔡守煥(Chae, Su-Hwan)
간행물 정보
『백산학보』第82號, 107~149쪽, 전체 43쪽
주제분류
인문학 > 역사학
파일형태
PDF
발행일자
2008.12.30
7,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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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문의
논문 표지

국문 초록

이 논문은 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성공적으로 高麗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지방의 豪族勢力을 어떦게 통제하고 회유 하였는가에 대한 이해를 얻기 위해 작성되었다. 그래서 왕건의 후삼국통일 과정과 호족세력, 고려건국 후의 왕권과 호족세력과 관계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왕건의 家門은 作帝建代에 이르러 서해의 해상세력과 혼인을 통하여 제휴하면서 고려왕실의 연고지인 송악지방에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구축하였다. 왕건가문의 居城이었던 永安城이 왕건의 祖父인 작제건대에 축조되었는데 이것은 왕건가가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송악에서 확고한 지방세력으로서 기반을 닦은 것이 그의 祖父代였음을 알 수 있다. 弓裔가 패서지역으로 진출해 왔을 때 왕건가문이 궁예에게 귀부하자 우대와 신임을 받았는데 그것은 왕건의 가문이 松嶽地方을 중심으로 막대한 才力과 세력기반을 가진 대호족세력 이었기 때문에 이를 크게 이용할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궁예는 토착적 세력기반이 약한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송악지방을 중심으로 확고한 세력기반을 가지고 있는 왕건가문을 중용하여 송악을 國都로 정하고 고구려의 계승자라는 뜻으로 後高句麗를 세우게 된다. 하지만 왕건가문의 세력기반이 강하게 구축되어 있어서 자신의 세력구축이 어렵게 되자 수도를 鐵圓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왕건이 나주지역을 정벌하면서부터 王京에서 어느 정도 독자적인 세력을 확보하기 시작하였으며, 궁예의 세력기반이었던 청주인 아지태를 척결하면서부터 철원에서 궁예와 맞설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즉 왕건은 철원에서도 자신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왕건과 궁예가 처음에는 서로 협력하면서 지내다가 대립적인 관계로 전환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서로 다른 國系意識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을 추대한 政變의 주체자들은 집권세력 圈外에 있는 武人의 中堅勢力들이었다. 왕건의 고려건국은 철원을 중심으로 하는 가장 유력한 호족의 세력교체에 불과하였다. 즉 기존의 국가를 계승한 것이었기 때문에 지방에는 호족 세력들이 그대로 웅거하고 있었다. 왕건의 신하라 할지라도 궁예의 摩下에서 어제의 동료요 전장에서 고락을 같이 한 벗들이니 왕권의 위험이 명확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였다. 심지어 측근세력 중에서도 왕권에 도전하는 사례가 일어나고 있었음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고려 초에 있어서 왕권이 미치는 범위는 제한되어 있어서 지방은 거의 호족에게 일임되어 있었다. 따라서 새 왕조의 유지에 있어서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하는 것은 지방에서 독립적으로 웅거하고 있던 호족세력들이었다. 그리하여 태조는 즉위 직후부터 호족들에게 和親을 표하는 등 회유책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결과 많은 호족세력이 고려왕조에 귀부하여 오게 되었다. 즉 왕건의 후삼국통일은 각 지방에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호족세력들이 귀부하여 오게 됨으로써 가능하였던 것이다. 호족세력들이 왕건에게로의 귀부는 고려정부로서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이 당시 왕건 태조는 후삼국통일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지방에 근거지를 두면서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안정 된 기반을 가지고 있던 호족세력들의 귀부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후삼국의 勢力關係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즉 귀부하여 오는 호족은 왕건이 후삼국통일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루는 데 있어서 커다란 바탕이 되었다. 그리하여 왕건은 귀부하여 오는 호족에 대하여 응분의 예우를 잊지 않았다. 豪族勢力의 협조를 얻어서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성공한 왕건으로서는 호족과의 연합적인 정치체제 위에서 권력을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왕건은 호족의 세력기반을 중앙행정력에 완전히 흡수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고려 국왕과 지방의 호족 쌍방간에 互惠的인 관계에 바탕을 둔 同盟的인 성격이 농후하다고 봐야 한다. 비록 개성에 올라와서 태조 왕건을 섬기는 호족이라 할지라도 그 호족이 지니고 있는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왕권에 의해 전혀 침해받지 않았으며, 다만 왕건은 호족을 통하여 그 세력기반을 이용하였을 뿐이고 왕건 자신의 것으로 직접 흡수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호족들을 중앙정계로 끌어들이고 그들과의 협조 속에서 정치적 안정을 꾀해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태조가 호족세력의 이탈을 방지하고 동시에 고려왕실의 세력기반을 강화할 수 있는 가장 큰 중요한 정책의 하나가 結婚政策이었다. 또한 호족정책의 일환으로서 다른 호족을 견제하기 위한 새로운 자신의 세력기반을 구축하기 위하여 즉위하던 해에 바로 서경경영에 착수하였다.

영문 초록

Wang Geon had established an unitary nation through the Later Three states on the end of Silla dynasty, which was based of the growth of Powerful Family in Song-Ak Country. Before being unification, he was an adjutant general of Gung-Yae Army, After acquired a Naju influence in South-West Coast, he was able to start increasing in Power. Wang-Geon had expelled Gung-Yae from the authority and established Koryo. Since he had an effort to come into intimate relation with other powerful families all over the Country, they Came under the jurisdiction of him. According to give in their Submission, he was capable of achieving unification Successively. Dowing to powerful families aid, he had achieved unification of the three states. And So he had to Preserve the authority under Co-relation of Powerful families. As a result, he could not establish a centraliged monarchy which completely grasping powerful families during his times. Therefore his political system ought to be co-relation with them.

목차

Ⅰ. 머리말
Ⅱ. 王建家門의 勢力實態
Ⅲ. 後三國統一과 豪族勢力
Ⅳ. 太祖代 王權과 豪族勢力
Ⅴ. 맺는말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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蔡守煥(Chae, Su-Hwan). (2008).王建의 高麗建國 過程에 있어서 豪族勢力. 백산학보, (82), 107-149

MLA

蔡守煥(Chae, Su-Hwan). "王建의 高麗建國 過程에 있어서 豪族勢力." 백산학보, .82(2008): 107-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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