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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On Beijing Decision-Making to Participate in The Korean War

이용수 137

영문명
발행기관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저자명
Vorontsov A. V.
간행물 정보
『역사문화연구』제25집, 115~151쪽, 전체 37쪽
주제분류
인문학 > 역사학
파일형태
PDF
발행일자
2006.06.30
7,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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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문의
논문 표지

국문 초록

이 논문은 한국전쟁의 판도를 변화시킨 중국의 참전 배경과 결정 과정에 대해 여러 논쟁을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그에 대한 사실적 결론을 도출하려는 시도이다. 중국의 최종 참전결정은 1950년 10월에 이루어졌다. 미국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위기에 봉착한 북한은 1950년 9월 28일 소련과 중국의 직접적 군사개입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북한의 지원요청에 대해서 스탈린은 소련의 지원은 언급을 피한 채 모택동에게 중국군 5-6개 사단의 투입을 요망하였다. 중국 참전의 배경은 1950년 10월 2일에 모택동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10월 2일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은 상이한 내용을 담은 2가지 종류의 전문으로 작성되었다. 1987년 중국에서 공개된 모택동의 첫 번째 전문은 북한을 돕기로 결정했으며 이에 따른 미국의 중국공격 가능성과 중국의 손실 및 소련의 군사지원 요청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1950년 10월2일 주중 소련대사 N. 로신을 통해서 보내는 다른 내용의 전문은 몇 개의 사단으로 한국문제의 해결이 어렵고 확전의 가능성이 농후하기때문에 참전 준비를 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며 또한 아직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스탈린의 조언을 구한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상이한 두 전문에 대해서 만수로프는 중국이 북한에 군사를 보내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판단하고 러시아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된 전문에 대해 중국 소장본보다 더 큰 신뢰감을 보여준 반면 심지화는 러시아측 보관 전문 뿐 아니라 중국측 보관 전문도 신빙성이 있으며 이 역시 스탈린에게 보내졌으리라고 주장한다. 즉, 1950년 10월 1일 자 스탈린의 전문에 대해 모택동은 즉시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10월 4-5일에 열린 정치국확대회의에서 결론을 내리고자 했으나 지도부의 반대에 부딪혔고 회의의 주요 분위기는 ‘확실히 필요해질 때까지 참전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심지화는 이를 바탕으로 ‘모택동이 북한에 군대를 보낼 것이었으며 개인적으로 10월 1일 스탈린의 전문에 답할 전문의 자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 지도부의 인물들로부터 심각한 반대에 부딪혔고 준비한 전문을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대신에 다른 전문(러시아국립문서보관소 소장본)를 보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1950년 10월 4-5일에 열린 정치국 회의에서 모택동은 사회주의 진영을 지켜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침으로써 참전에 대한 다른 지도자들의 동의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10월 1일의 스탈린의 전문에서는 확실히 소련의 지원에 대한 언급이 없었으며 모택동은 ‘모호한 전술’을 사용하여 소련으로부터 전쟁 원조를 받아내고자 했다. 모택동이 작성한 상이한 내용을 담은 두 건의 전문 중 중국 소장본은 스탈린에게 전해지지 않았으며, 이러한 모택동의 모호한 행동은 한국전쟁에 대한 중국의 원칙적 지지를 나타냈고 동시에 소련에 대한 압박으로 풀이되었다. 1949년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전쟁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나 스탈린은 전쟁을 반대했으며 지원 역시 거부했다. 그러면서 스탈린은 모택동의 동의를 받을 것을 요구했다. 만약 모택동이 전쟁을 반대했다면 개전은 연기되었겠지만 모택동은 필요할 경우 군사지원을 약속했다. 또한 군사행동을 통해서만 한반도의 통일이 가능함을 언급했으며 미국의 참전가능성을 낮게 평가했다. 그리고 중국은 소련의 방호 여부에 관계없이 1950년 10월 19일 한반도에 진입할 것이라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스탈린은 중국과 소련만으로도 사회주의 진영은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으나 모택동은 이와 다르게 평양을 ‘포기’하지 않았다. 중국은 자국의 내전이 종결된 지 겨우 1년 밖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국가가 매우 피폐한 상황이었지만 전쟁 참전에 큰 두려움을 보이지 않았다.

영문 초록

This article attempts to analyze some important aspects of Beijing taking a decision to participate in the war against the USA in Korea. One of the decisive events in the course of war in Korea was the involvement of communist China on October 19, 1950. The final decision of China to participate in the war was taken in October 1950, when the North Korean regiment faced the threat of a close collapse. Political bureau of the Korean Labor Party, on September 28, tool a decision to turn to the USSR and China for direct military help. In a telegram to Mao Zedong of October 01, Stalin urged China to right away move not less than 5-6 divisions to the 38th parallel, without mentioning what actions Moscow was going to take to assist the North Korea. This problem caused serious disputes among Chinese and foreign scientists, as some time ago, in the result of publicizing a number of new archive materials, two contradicting versions of Mao Zedong’s telegram to Stalin appeared, dated October 02, 1950. Mao was not able to give a firm answer to Stalin’s telegram of October 01 at that moment. Factually, even at the broader meeting of the Political bureau on October 4-5 the decision was not taken due to serious objections from the part of the majority of the leaders against sending troops to Korea. The major mood was “better not to participate in the war until it becomes absolutely necessary.” Using “elusive tactics” Mao Zedong tried to press Stalin in order to get Soviet guarantees on providing the whole volume of the necessary equipment and other military assistance, as well as providing air cover for Chinese forces in Korea and important centers on China’s territory, which were considered by Beijing as a sin qua non condition of its participation in the war. Both variants of Mao Zedong’s telegram to Stalin of October 02, 1950 are authentic, but the Chinese variant was not sent to Moscow due to tactical reasons. Elusive behavior of Mao Zedong spoke of changes not in the principle position of China on the issue of entering the Korean war, but tactics with which the Chinese leader tired to press Stalin to most urgently provide the Soviet military assistance and air defense on the maximally large scale. Beijing in the process of the dramatic discussions took the decision“not to give up” Pyongyang.

목차

Ⅰ. Preface
Ⅱ. Does the history repeating today?
Ⅲ. How was the decision to intervene the Korean War made by Beijing? Disputes are continuing
Ⅳ. The Korean War lessons for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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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rontsov A. V.. (2006).On Beijing Decision-Making to Participate in The Korean War. 역사문화연구, 25 , 115-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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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rontsov A. V.. "On Beijing Decision-Making to Participate in The Korean War." 역사문화연구, 25.(2006): 115-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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