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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1930년대 ‘식민 도시’ 경성(京城)의 영화 소비의 장 전환

이용수 58

영문명
Nationalizing Film Business and the Transformation of the Sphere of Cinema Consumption: Keijō as a Showcase
발행기관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저자명
김순주
간행물 정보
『역사문화연구』제86집, 245~277쪽, 전체 33쪽
주제분류
인문학 > 역사학
파일형태
PDF
발행일자
2023.05.31
6,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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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문의
논문 표지

국문 초록

식민지 조선에서 영화를 둘러싼 정책과 환경은 몇 가지 전환점을 맞는데, 1930년대에 있어서 그 동인의 하나는 ‘영화국책(映畫國策)’이었다. 영화국책은 식민지 영화계에 대한 통제 강화로만 평가되기 쉽지만, 그 전후 사정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유럽과 미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이 얽히고 매개된 일종의 ‘다국경적’ 흐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영화국책은 일본의 영화통제사에서도 영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시한 획기적 전환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는 미국 영화에 대한 범정부적 차원의 대응을 이끌어낸 흐름으로서, 그 여파는 식민지 조선이라는 작은 영화 시장에까지 미쳤다. 영화국책에 대한 이와 같은 문제설정에 기초해서 이 글에서는 세 가지 층위에서 영화국책을 살펴본다. 우선, 일본 영화국책 수립의 일환으로 식민지 조선에 도입된 ‘상영 할당제(screen quota)’의 연원을 추적한다. 영화국책 수립에서 핵심이 된 자료를 분석한 결과 식민지 조선의 상영 할당제는 영국의 ‘1927년 영화법(Cinematograph Films Act, 1927)’을 참고하여 만들어졌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이와 함께 영국과 식민지 조선의 상영 할당제의 비교를 통해 제국 일본의 영화국책의 한계성도 드러낸다. 식민지 조선에서 국책적 영화통제, 특히 상영 할당제의 실시를 통해 당국이 보호하고자 한 대상은 ‘국산(國産)’ 영화, 즉 일본 영화였다. 일본 영화는 그 활발한 제작과 국내 수요에 비해 해외 진출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 대신 일본 영화가 ‘국외’로 유통된 주된 루트는 식민지와 이민지, 즉 일본인 정착지였다. 이와 같이 일본 영화의 유통적 특성에 대한 파악은, 식민지 조선의 당국이 흔히 언급하듯이,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 영화의 상영이 저조했던 사정이 ‘식민지 조선의 특수성’ 문제만이 아니라 일본인을 중심으로 필름이 유통되고, 또 소비된, 일본 영화의 유통적 특수성이 작용했다는 점을 하나의 설명 요인으로 제시해 줄 것이다. 세 번째로는 영화국책의 로컬 층위로서, ‘쇼케이스(showcase)’로서 경성의 상영 현장에 초점을 맞춘다. 국책적 영화통제의 일환으로 1934년 9월에 상영 할당제가 시행되고부터 양화(洋畫) 상영관, 곧 조선인을 주된 소비자로 한 영화 상영 공간은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다른 한편, 1935~1936년에 경성 ‘남촌’에서는 무려 세 곳의 영화관-메이지좌(明治座), 와카쿠사영화극장(若草映畫劇場), 고가네좌(黃金座)-이 신축되는데, 이들은 국산(일본) 영화의 상영을 진작한다는 영화국책의 취지에 걸맞게 ‘쇼치쿠(松竹)’와 ‘도호(東寶)’의 ‘작은 시장’으로 새롭게 부상하였다. 영화국책 이후 경성의 상영 현장에 나타난 일련의 변동들은 상영사만이 아니라 상영 공간의 의미 변화를 탐색하는 데도 중요하다. ‘조선인 영화관’ 또는 ‘내지인 영화관’은 경성이 ‘식민 도시’로 전환하는 프로세스에서 출현한 일종의 ‘종족 경관(ethnoscape)’이었다. 영화국책의 흐름 속에서 등장한 ‘대 영화전당(movie palaces)’은 영화적 실천이 종족적 내향성을 강화하는 시대의 퇴조를 고하면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접촉 지점’을 만들었다. 이는 ‘식민 도시’ 경성의 로컬리티를 보다 복합적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였을 것이라고 본다.

영문 초록

One of the transformative factors that has re-directed the realm of the cinema in colonial Korea was the move toward the nationalizing of film business that was taken in imperial Japan in the early 1930s. To mention it briefly, it was intended to protect and develop film business as a state industry. Following imperial Japan’s steps immediately, the Government-General of Korea (GGK) has promulgated a new film policy named ‘Motion Picture and Film Regulation Rule’ (No.82 ordained by the Government-General) in August 1934 and implemented the policy of ‘screen quota.’ This paper aims to examine the ‘geopolitics’ of the screen quota because the latter was one of the crucial factors that would transform the sphere of cinema consumption in colonial Korea, especially in Keijō (colonial Seoul). In the colonial city, the showing and watching of movies have long been divided between colonized Koreans and the Japanese settlers. The move toward the nationalizing of film business, along with the opening of new theaters called ‘movie palaces,’ would reconstruct the cinema of the colonial city and help to generate the ‘contact space’ between the two peoples.

목차

Ⅰ. 머리말
Ⅱ. 새로운 전환점으로서 ‘영화국책’
Ⅲ. ‘국산=일본’ 영화의 유통적 특성
Ⅳ. 영화국책의 ‘쇼케이스’로서 경성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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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주. (2023).1930년대 ‘식민 도시’ 경성(京城)의 영화 소비의 장 전환. 역사문화연구, (), 245-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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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주. "1930년대 ‘식민 도시’ 경성(京城)의 영화 소비의 장 전환." 역사문화연구, (2023): 245-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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