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의 재편과 민족 지도자들의 대외 인식
이용수 517
- 영문명
- 발행기관
- 한국정치외교사학회
- 저자명
- 전상숙
- 간행물 정보
- 『한국정치외교사논총』제26집 제1호, 313~349쪽, 전체 37쪽
- 주제분류
- 사회과학 > 정치외교학
- 파일형태
- 발행일자
- 2004.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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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제1차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으로 국제관계는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재편되었다.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형성되었고, 사회주의체제의 동장으로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다. 또한 양 체제에서 선언한 ‘민족자결’을 계기로, 전쟁 중에 자각된 식민지 약소민족의 민족적 자각이 분출했다. 식민지 약소민족의 민족해방운동의 고양되었다.
그러한 현상은 전후 파리강화회의에서 워싱턴체제에 이르는 1920년 전 후시기에 국제질서의 재편과 맞물려 복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과정에서 독립을 기대한 식민지ㆍ약소민족들은 열강 중심의 대립적 이해의 조정에 실망하는 한편 신생국 사회주의 러시아의 민족해방운동 지원에 대한 새로운 기대를 갖기 시작했다. 국내외에서 각기 독립의 방안을 모색하던 우리 민족 지도자들은 파리강화회의와 워싱턴회의에 직접 독립청원을 호소했다. 식민지 한국이 일제로부터 핍박받는 상황이나 비인도적인 일제의 지배를 토로하고, 열렬한 한국인들의 독립 열망을 호소했다. 파리강화회의를 통해서 실리적인 국제관계를 경험했으나 강대국의 지원을 얻어 독립하는 희망을 버릴 수 없어 미국의원단 방한과 같은 사소한 기회조차 독립청원과 민중의 독립 열망을 고조시키는데 적극 활용하려 했다.
민족 지도자들의 기대와 호소는 실리를 중심으로 질서와 관계가 조정되는 무정부적인 국제사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이었다. 민족 지도자들은 독립에의 열망에 충만한 나머지, 열강이 그들간의 이해의 조정에 유리한 입장을 점하고자 내건 선언적 구호를 그대로 받아들였고, 국제관계와 연동되어 변화될 수밖에 없는 식민지 한국이 처한 상황을 냉정하게 구조적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열강이 표방하는 선언은 실리적인 이해타산에 기초한 명분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현실의 절박함과 미약함으로 인해 열강에 지원을 요청하고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구미 열강에 대한 기대가 좌절되고 사회주의 러시아와 코민테른에 또 다른 기대와 희망을 품게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국가를 상실한 식민지 상태에서 무엇보다도 급선무는 국가를 찾는 민족독립이었다.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독립이 가능하다면 그 가능성에 기대어 민족의 독립을 구현하는 것, 그것이 당시 민족지도자들의 인식의 출발점이었다. 힘의 열세로 인한 현상의 타파를 독자적인 힘을 키워 자립을 모색하는 것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힘에 의존하여 극복하고자 함으로써 또 다른 형태의 예속을 불러올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던 상황, 이것이 곧 우리 민족 지도자들의 국제정세 인식의 딜레마이자 현실이었다.
영문 초록
The international relations were reorganized after Russian revolution and World War I. America became the leading power of international affairs, and the confrontational structure was established due to the appearance of Soviet Russia. The national liberation movement, highly stimulated by the declaration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 of both systems, was enhanced in colonies.
Such a situation was unfolded complexly mixed with the reorganization of international relations during early 1920s from Paris peace conference to Washington conference. Colonies expected national liberation on the process and disappointed with Western powers only interested in the manipulation of their own interests, and came to expect on Soviet Russia to support their national liberation. Korean National leaders who were searching for the way to liberate nation in and out of Korea, appealed Koran liberation from Japan to Paris and Washington conference. They experienced practical international relations through the Faris Conference, but could not give up the hope to liberate their nation with support of super powers. So that they tried to make the good use of American congressmen s visiting Korea to appeal Korean liberation and raise up Koreans national emotion.
Korean national leaders lacked international society manipulated with practical interests. They were full of desire to liberate, so that accepted the declaration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 as it was, and could not objectively recognize colonial Korean situation in the international structure. The declaration was only the justification of super power based on their practical interest. Nevertheless, it was a reality for colonial leaders to ask the support of super powers to liberate.
It can be understood in the same context for some of them to expect and have hope for national liberation after disappointed with Western powers. The urgent and ultimate purpose was the national liberation in colonies. It was the starting point of their efforts and perception of international affairs for national leaders. It was not the way to develop national power to liberate but to ask support for liberation to another super powers. It had the possibility of subordination to the state to support national liberation. It was the dilemma and the reality of Korean leaders atthat time.
목차
Ⅰ. 머리말
Ⅱ.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의 재편과 동아시아
Ⅲ. ‘민족자결’ 선언의 영향과 기대
Ⅳ. 민족 지도자들의 대외 인식
Ⅴ. 맺음말
〈참고문헌〉
〈초록〉
〈Abstract〉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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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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