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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遼의 自國에 대한 인식과 중국관

이용수 1211

영문명
遼的自國觀與中國觀
발행기관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저자명
박지훈(朴志焄)
간행물 정보
『역사문화연구』제48집, 41~72쪽, 전체 32쪽
주제분류
인문학 > 역사학
파일형태
PDF
발행일자
2013.12.30
6,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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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문의
논문 표지

국문 초록

10세기 중엽에서 12세기 초까지 중국역사에서 송과 요는 대치의 시기였다. 이 150여년 동안 송과 요는 두 개의 강대한 정권으로 서로 대결하였는데 전쟁과 평화가 교차되었다. 일반적으로 당시의 중국역사 가운데 송이 대표적인 왕조로 되어있으나 이미 당시에도 남북조 說이 있었다. 요 왕조(907~1125년)가 북방을 통일한 것이 남방에 비해 반세기가 앞서 있었다. 영토면적만으로 보면 요는 송의 2배에 달한다. 요조는 尙武的이고 전투력이 강한 騎兵을 앞세우고 중국 동북, 북과 서북을 향해 진출하여 차지하였고, 전에 없는 효과를 거두었다. 전연의 맹약에 따라 요송 쌍방은 피차에 서로 승인한 ‘남조’, “북조” 라는 두 개의 독립적 왕조가 당시의 역사무대에 출현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송에 관한 기술과 연구가 많이 있으나 요에 대해서는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던 점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거란인 스스로 자신들의 민족과 국가에 대한 생각과 관점 및 중국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보았다. 당시 遼人의 著作이 거의 남아있지 않고, 宋人과 蒙古人들의 기술이 대부분이므로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중국 왕조의 입장에서 서술한 자료에는 요에 대한 왜곡된 시각과 평가가 적지 않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가능한 한 요의 입장을 위주로 하여 해석하고 평가해 보고자 하였다. 북송과 마찬가지로 요 역시 스스로 중국을 대표한다고 인식하였고 또한 ‘正統’이라고 자처하였다. 상고시기에 유가들은 소위 ‘華夏’와 ‘夷狄’의 구별은 주로 문화에 의한 것이었지 혈통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거란통치자들을 이러한 관념을 접수하였을 뿐 아니라 진일보시켰다. 그들은 요조가 이미 중원의 전통문화를 접수하였다고 하였으며 다시 ‘四夷’의 반열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고 마땅히 북송과 병렬한다고 보았다. 우선 중원지역을 지배하게 되면서 北面, 南面에 의한 이중적인 통치 구조를 채택하였다. 우선 북면관에 있어서는 고유성을 존중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남면관은 정복한 漢地와 漢人에 대해 어찌할 수 없는 현실적 필요에 따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요가 이원적인 제도에 의해 자신들의 부족의 전통을 보존하면서도 연운십육주를 얻은 다음에 당의 제도를 도입하고 중국인들을 불러 모아서 등용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자신들의 유목적인 통치방법이 중국에 비해서 수준이 낮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한족의 문화나 중국식 제왕의 성대한 시대를 요에서도 이루기 원했던 의지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先祖를 炎帝라고 한 점으로 보아 중국 민족과 同一視하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이를 해석하면 자존심과 열등감의 양면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하나 간과하기 어려운 것은 현재 중국에서의 민족융합과 고대사 탐원공정 및 동북공정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요사』서술은 중국적 왕조로서의 자신감과 동일시를 보여준다. 그 이외의 역사 서술 또한 그와 같은 맥락이다. 거란 민족의 고유성을 보여주는 예로는 두 차례에 걸친 거란문자 창제를 들 수 있다. 한편 요는 중국과 대등한 국가라는 인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거란을 건국한 야율아보기 이후 오대의 불안정한 정권교체에 개입하면서 때로는 중국왕조를 책봉하기도 하였고, 전연의 맹약에서 문서상으로도 북조와 남조라는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중국 대륙의 두 개의 나라가 있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하지만 문화적인 면에서는 중화민족의 선진적인 문물을 도입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또한 여러 정복국가의 예에서 보듯이 유목국가로부터 농업국가로 변신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요의 후기는 한화정책을 강도 높게 추진하는 추세로 옮겨가는데 이는 이미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또한 중국인과 융합함으로써 또 하나의 중국으로 변신해 가고자 하는 추세의 한 면일 것이다 결국 요는 건국 초기부터 중원의 왕조와 남북조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가, 전연의 맹약 단계에서는 공식적으로 남조와 북조로 천명하였고, 후기에 가면 ‘華夷同風’이라고 표현 것처럼 자신들도 夷狄의 나라가 아닌 중국과 동일시하며 요의 통치자가 요 역시 禮法을 갖추었기 때문에 중화와 같다는 자존심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문 초록

從10世紀中葉至12世紀是在中國歷史上的宋遼對峙時期. 在這150餘年間, 宋遼兩大政權戰•和不定. 在中國歷史上, 宋朝是代表當時的正統, 但是也有人提倡‘南•北朝說’. 遼王朝建立比南方的宋王朝早半世紀. 從領土面積來看, 遼朝比宋朝大一倍. 遼朝利用戰鬥力強悍的騎兵, 征服了中國東北•北方•西北的大片地區, 空前強大. 澶淵之盟以後, 宋遼雙方承認彼此, 而在歷史舞台上出現‘南朝’•‘北朝’兩個獨立的王朝. 本文要主題爲遼朝契丹人的民族意識•對漢文化的認同感•正統觀以及其對中原王朝的看法. 由於流傳至今的契丹文獻極少, 研究這一問題難度較大. 現在流傳的記載大部分是宋朝•蒙古人所做記載, 其中有不少對遼人的偏見. 這就造成了目前學界有 關宋朝的研究成果較多, 有關遼的研究成果卻較少, 而且以前對遼的評價大部分持‘非正統’觀點. 本文將以遼人的立場•視角爲中心, 重新做出評價, 以期能在一定程度上能扭轉這一狀況. 實際上, 翻檢史書, 不難發現遼朝在保有強烈的民族自豪感同時, 也表現出較爲強烈的對漢文化的認同感, 自認是中華文化的‘正統’, 能夠代表中國. 在上古時期, 儒家按照文化, 而非按照血統, 劃分所謂‘中華’與‘夷狄’的分別. 契丹統治者接受了這些觀念認爲, 他們已經接受中原傳統文化, 甚至宣稱自己爲炎帝後代, 所以自己不應該包括‘四夷’的範圍裏, 而應該與北宋並列. 這也今天中國進行的民族融合•探源工程•東北工程的歷史依據. 必須指出, 遼人這種行爲, 折射出了他們內心中自尊心和自卑感並存的複雜情緒. 遼人一直有自己與中國對等國家的想法. 建立契丹的耶律阿保機以後, 憑借強大軍事實力, 幹涉五代中原王朝, 有的是冊封中國王朝, 在澶淵之盟的文書上更是使用“北朝”和“南朝”的稱呼, 證明在中國大陸存在兩個國家. 但是, 在交往過程中, 遼不可避免受容中國的先進文化影響, 逐步從遊牧國家向農業國家發展. 遼朝在統治地區內, 實行的‘北面•南面’的二元統治體制就是一個體現. 北面官是保存遊牧民族的固有傳統, 南面官統治漢地與漢人. 遼朝在北部施行北面制保存自己部族的傳統, 同事在新征服的燕雲十六州, 接受唐朝的制度, 采用漢人統治漢人方式, 這就是反映了他們接受遊牧民族的統治方法比中國落後的現實. 在文化上, 遼人也有這種矛盾心態. 一方面, 契丹民族兩次創制契丹文字, 這就是證明契丹民族的固有性. 但在同時, 遼朝也實行漢化政策, 這表現他們接受中國文化•與中國人融合後自己的身份成爲中國文化代表的意願. 總之, 遼朝從建國初期已經有中原王朝和南北朝的認識. 在澶淵之盟時期闡明南朝與北朝, 到後期使用‘華夷同風’, 都證明他們並不認同自己爲夷狄國家, 而是中原的國家. 遼朝他們說他們也是用禮法, 因此他們應當跟中原王朝同等的地位, 這就是表達他們的自尊心.

목차

Ⅰ. 머리말
Ⅱ. 요의 自國에 대한 인식
Ⅲ. 요의 중국관
Ⅳ.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中文提要>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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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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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훈(朴志焄). (2013).遼의 自國에 대한 인식과 중국관. 역사문화연구, 48 , 4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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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훈(朴志焄). "遼의 自國에 대한 인식과 중국관." 역사문화연구, 48.(2013): 4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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