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검색어

실시간 인기 검색어

학술논문

高麗末 親明外交와 圃隱 鄭夢周의 外交觀 - 恭愍王~禑王初를 중심으로

이용수 652

영문명
Pro-Ming China diplomacy (親明外交) in the late days of Goryeo Dynasty and diplomatic outlook of Chŏng Mong-ju (鄭夢周) -around King Kongmin(恭愍王)~in the early of King U(禑
발행기관
포은학회
저자명
유경아(Yoo Kyung A)
간행물 정보
『포은학연구』제1집, 123~158쪽, 전체 36쪽
주제분류
인문학 > 기타인문학
파일형태
PDF
발행일자
2007.12.01
7,120

구매일시로부터 72시간 이내에 다운로드 가능합니다.
이 학술논문 정보는 (주)교보문고와 각 발행기관 사이에 저작물 이용 계약이 체결된 것으로, 교보문고를 통해 제공되고 있습니다.

1:1 문의
논문 표지

국문 초록

  圃隱 鄭夢周 (1337~1392)의 외교관은 기본적으로 고려 恭愍王의 親明외교정책을 계승한 것이다. 공민왕은 14세기 동아시아의 강자로 부상하는 明과 朝貢冊封체제를 성립시켰다. 그것은 바로 80여녀간이나 지속되어 온 원지배체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여 고려왕과 고려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길이기도 했다. 또한 宋明의 성리학을 수입하여 사회개혁의 이념적 기반으로 삼고 ,성리학을 교육하여 개혁을 추진해갈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당시 성균관을 중심으로 새로운 개혁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던 신진사 대부들은 親明정책을 지지하였다. 포은은 사대부집단을 대표하여 친명외교를 주창하였고 ,1372-1373년 대명사행을 통해 명나라를 형세와 문화적 가치가 일치하는 사대의 대상국으로 인식하고 친명외교를 주창하게 되었다. 그런데 친명외교는 바로 개혁정치를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수세대에 걸쳐 원의 지배체제에 구조적으로 종속되어온 고려의 지배층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신진 사대부들은 아직 정치세력화 되지 못했기 때문에 친명외교에 참여할 수 없었고, 단지 국왕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 전개되었다.
  그런데 1374년 9월 공민왕이 시해되고 .정권을 장악한 이인임등 권문세족은 이른바 ‘공민왕시해와 明使살해사건’에 明의 압력을 피하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親元외교를 재개했다.
  그러나 신진사대부들은 이인임정권의 친원외교의 재개를 공민왕의 개혁정치를 부정하는 국정운영전반에 대한 보수화 및 과거회귀로 규정짓고 집단적으로 반발하였다. 공민왕대 신진사대부들중 유일하게 明에 다녀온 포은은 ‘請勿迎元使疏’ 를 주도하면서 친명외교가 14세기 변화하는 동아시아 국제정세 속에서 고려가 추구해야할 외교의 大計임을 밝히고 그 근거를 피력하였다.
  포은은 北元사신을 맞아들이지 않으면 ,북원의 침략을 불러올 것이라는 이인임세력의 주장에 대해 ,친명외교를 하지 않으면 더 강한 明軍의 침략을 불러 올 것이라고 대응하고 있다. 즉 친명사대의 당위성은 明이 도덕적으로 옳다거나, 漢族이라거나 ,문화적으로 우월한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명이 형세상 强國이므로 사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그것을 강력하게 주창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성리학의 화이론을 철저히 답습했다기 보다는 공민왕의 개혁정치를 통해 체득한 현실인식과 대명사행을 통해 얻은 국제정세에 대한 경험주의적 인식이 바탕이 되었다.
  ‘請勿迎元使疏"를 통해 포은은 權臣이 아니라 ‘國家 ,臣民의 입장’에서 외교정책을 수립할 것 , 그리고 고려의 군사력을 길러 자위력을 갖추고 ,강대국 明과 동맹관계를 맺어 외부의 군사적 위협에 대처하고 , 국내정치에서는 고려국 스스로 자율성을 확보하려는 실리적인 외교방책을 제시하였다.
  ‘請勿迎元使疏’ 사태로 인해 외교문제가 정권의 생명과 직결됨을 깨달은 이인임등 權臣들에 의해 포은을 비롯한 신진사대부들은 철저하게 숙청되었으나 이 사건은 외교문제로 촉발된 신진사대부와 권문세족의 최초의 정치적 대결이었다는 점에 고려 말 정치사적 의의를 갖는다.
  또한 고려 말 포은이 적극 주창한 친명외교 전략은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3세기 간 對中外交의 기본정신으로 계승되었다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영문 초록

  This thesis aims to study of diplomatic outlook of Ch?ng Mong-ju in the late of Goryeo and to find out its historical meaning. Diplomatic outlook of Ch?ng Mong-ju fundamentally succeed to pro- Ming China diplomacy of King Kongmin. (恭愍王)
  King Kongmin made Goryeo belong to the tribute system(朝貢體制) of Ming (明) center out of it of Yuan(元)center. It was a way to be opposed against control of Yuan during 80 year and also to propel spot of Goryeo king and Goryeo nation. And it aims to take in Neo-C onfucianism(성리학) and to make a social reform based on it.
  Ch?ng Mong-ju lead the chorus of foreign policy toward Ming China as a representative of new -Sadaebu(新進 士大夫) and he perceived Ming to be new center in East-Asia international relation through the Trip to the Ming (對明使行) in 1372-1373.
  But pro- Ming China diplomacy (親明外交)was not supported by rulers because of being considered it as polical reform. Besides new -Sadaebu(新進士大夫) except Ch?ng Mong-ju did not take part in pro- Ming China diplomacy for not having political power yet , but rather it developed by King Kongmin
  By the way, King Kongmin was murdered in 1374, Yi In-im(李仁任) resumed pro-Yuan policy(親元外交) on the purpose of holding up political power. But new -Sadaebu was opposed to pro-Yuan policy massively, especially Ch?ng Mong-ju take the lead in movement against it .
  Ch?ng Mong-ju proposed ‘請勿迎元使疏" (Chung mul yuan sa so) and express his views boldy about diplomactic policy that Goryeo must push ahead after this in the future. First , A diplomactic policy must be establishe for the benefit of the nation(國) and peope (民) not for a power holder(權臣)
  Second , Goryeo build self-defense capabilities and ally with a powerful country, Ming China for protecting against external enemy ,and by that way Goryeo governs independently in internal politics. Third , he made a case for pro- Ming China diplomacy that not because Ming Chinais is justice or the Han(Chinese) race(漢族), or has superior cultivation but because situation (形勢)of Ming China is favorable over Yuan.
  Another reason for insisting on his pro-Ming policy is due to not only Neo-Confucianism knowledge but also his experience of Trip to the Ming(對明使行)
  Further ,pro- Ming China diplomacy of Ch?ng Mong-ju is handed down the Joseon dynasty and it had been kept up for 3th century.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恭愍王의 친명정책과 圃隱의 對明使行
3. 李仁任 정권의 親元外交와 "請勿迎元使疏"를 통해본 포은의 외교관
4. 맺음말
〈Abstract〉

키워드

해당간행물 수록 논문

참고문헌

교보eBook 첫 방문을 환영 합니다!

신규가입 혜택 지급이 완료 되었습니다.

바로 사용 가능한 교보e캐시 1,000원 (유효기간 7일)
지금 바로 교보eBook의 다양한 콘텐츠를 이용해 보세요!

교보e캐시 1,000원
TOP
인용하기
APA

유경아(Yoo Kyung A). (2007).高麗末 親明外交와 圃隱 鄭夢周의 外交觀 - 恭愍王~禑王初를 중심으로. 포은학연구, 1 , 123-158

MLA

유경아(Yoo Kyung A). "高麗末 親明外交와 圃隱 鄭夢周의 外交觀 - 恭愍王~禑王初를 중심으로." 포은학연구, 1.(2007): 123-158

결제완료
e캐시 원 결제 계속 하시겠습니까?
교보 e캐시 간편 결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