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7세기(世紀) 후반(後半) 백제부흥운동(百濟復興運動)의 두 노선(路線)과 왜국(倭國)의 선택(選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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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문명
- Two Lines of Baekje revival movement in Latter half of 7th century and the choice of Wa
- 발행기관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 저자명
- 이재석(Jae Seok Lee)
- 간행물 정보
- 『백제연구』백제연구 제57집, 207~233쪽, 전체 27쪽
- 주제분류
- 인문학 > 역사학
- 파일형태
- 발행일자
- 2013.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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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7세기의 동아시아는 격동의 시대였다.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신라와 당의 대결 등 한반도의 통일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격동 속에서 외교는 곧 국가의 사활과 직결된 중요한 문제였다. 본고에서는 백제부흥운동과 왜국의 관계를 다루었다. 백제 멸망 후 당으로 압송되었던 태자 부여융은 웅진도독부로 돌아와 같은 백제 왕족인 부여풍장이 지휘하는 백제부흥운동 세력을 괴멸시키는 데 선봉이 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부여융의 행동을 반역의 시점이 아니라 이것 또한 백제부흥운동의 한 갈래로서 파악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663년의 주류성-백촌강 전투는 친당 노선의 백제부흥운동과 反唐 노선의 백제부흥운동이 격돌한 아이러니컬한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부여풍장이 주도한 반당 노선의 백제부흥운동이 종식된 후 당은 곧바로 부여융과 신라의 문무왕 사이에 회맹을 주선하며 친당<백제>의 재건을 도왔다. 그리고 곧바로 과거 백제의 전통적 우방이었던 왜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일시적으로는 친당<백제>에게 백제 부활의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왜국은 신라의 적극적인 접근과 당의 왜국 침략 소문 등에 영향을 받으며 적극적으로 친당<백제>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왜국 내부의 사정에 대해서는 여전히 검토의 여지가 남아있지만, <백제>의 재건을 선전하며 왜국의 지원을 기대하였던 친당<백제>의 노력은 결국 물거품이 되고 신라에 병합되었다.
영문 초록
7세기의 동아시아는 격동의 시대였다.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신라와 당의 대결 등 한반도의 통일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격동 속에서 외교는 곧 국가의 사활과 직결된 중요한 문제였다. 본고에서는 백제부흥운동과 왜국의 관계를 다루었다. 백제 멸망 후 당으로 압송되었던 태자 부여융은 웅진도독부로 돌아와 같은 백제 왕족인 부여풍장이 지휘하는 백제부흥운동 세력을 괴멸시키는 데 선봉이 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부여융의 행동을 반역의 시점이 아니라 이것 또한 백제부흥운동의 한 갈래로서 파악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663년의 주류성-백촌강 전투는 친당 노선의 백제부흥운동과 反唐 노선의 백제부흥운동이 격돌한 아이러니컬한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부여풍장이 주도한 반당 노선의 백제부흥운동이 종식된 후 당은 곧바로 부여융과 신라의 문무왕 사이에 회맹을 주선하며 친당<백제>의 재건을 도왔다. 그리고 곧바로 과거 백제의 전통적 우방이었던 왜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일시적으로는 친당<백제>에게 백제 부활의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왜국은 신라의 적극적인 접근과 당의 왜국 침략 소문 등에 영향을 받으며 적극적으로 친당<백제>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왜국 내부의 사정에 대해서는 여전히 검토의 여지가 남아있지만, <백제>의 재건을 선전하며 왜국의 지원을 기대하였던 친당<백제>의 노력은 결국 물거품이 되고 신라에 병합되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齊明朝 친백제노선의 정립
Ⅲ. 백제부흥노선의 두 가지 길
Ⅳ. 친당<百濟>의 등장과 왜국의 대응
Ⅴ. 맺음말
키워드
해당간행물 수록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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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세기(世紀) 후반(後半) 백제부흥운동(百濟復興運動)의 두 노선(路線)과 왜국(倭國)의 선택(選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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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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