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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의 사회적 배경에 대한 연구

이용수 758

영문명
The Study on the Social Background of the 1866’s Persecution(Byeongin-bakhae) - with 1860-65’s as the center -
발행기관
인천가톨릭대학교 복음화연구소
저자명
김규성(Kim Gyuseong)
간행물 정보
『누리와 말씀』제29호, 81~124쪽, 전체 44쪽
주제분류
인문학 > 종교학
파일형태
PDF
발행일자
2011.06.30
8,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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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문의
논문 표지

국문 초록

본 논문의 목적은 병인박해가 발생한 사회적 배경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중 가장 큰 박해인 병인박해의 원인에 대한 연구는 정치적인 면에 치중되었다. 이제 정치적인 부분에서 벗어나 사회적 측면에서 살펴 보려고 한다. 조선 사회 안에 천주교 신앙이 널리 전파되었던 시기는 민중종교운동이 활발해진 시기와 유사하였다. 민중종교운동의 한 부류로서 1860년에 동학이 창설되었다. 동학 자체는 천주교나 서양 세력을 배척하였으나 조선 정부로부터는 천주교와 비슷하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런데 동학이 현세 안에서의 이상 세계를 추구한 반면에 천주교는 내세지향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즉 천주교는 적극적 사회 변혁을 추구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지만 기존 사회와 떨어진 이질적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천주교에 대한 경계심과 더불어 이들을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타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조선 사회에 퍼져 있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천주교에 대한 금령을 공식화한 척사윤음이 여전히 유효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화서학파로 대표되는 척사론자들의 저술이 계속 이어졌다. 이들은 서양적 가치질서의 기본성격을 통화와 통색으로 규정하여 배척하였다. 그리고 서양의 과학 기술에 대한 혹평을 하였다. 결국 이러한 요소들은 조선 사람들 대부분이 천주교에 대한 대규모 박해가 일어났을 때 이에 대해 동조하거나 무관심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될 수 있었다. 1860년대 전반기 조선에서는 북경 함락 소식의 전달, 민란, 동학의 창설 등과 같은 일들이 있었다. 당시 조선에 체류하고 있던 프랑스 선교사들은 이러한 일들에 대한 묘사와 평가를 하였다. 그리고 조선 천주교회에 미칠 영향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병인박해 바로 직전이라 할 수 있는 1865년의 상황에 대해서는 선교사들 사이에 인식 차이가 존재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교회에 대한 조선 정부나 사회의 분위기가 긍정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다른 선교사들은 이와는 다른 평가를 내렸다. 당시 중앙에서는 박해가 소강 상태에 있었지만 지방에서는 개별적인 박해가 이어졌다. 그러나 중앙 정부 차원에서 천주교 박해령을 완전히 철회한 상태가 아니었으며 지방의 개별 박해에 대해 통제를 가할 상황은 아니었다. 대규모 박해로 확대할 수 있는 정치적 명분이 없거나 박해 자체가 정치적 부담으로 다가올 때 약간의 수위 조절만을 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중앙과 지방에서 천주교에 대한 모순된 입장과 태도가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 상황이었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이러한 점을 제대로 파악하고 정리하지 못하였기에 이러한 엇갈린 평가를 하였다. 1860년과 1866년 사이에도 천주교 박해가 이어졌다. 이 박해들은 대체로 지방관의 자의적 판단에 의해 발생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사회 안에 천주교에 대한 경계심과 이질감이 있기에 이러한 박해가 가능했을 것이다. 이렇듯 조선 사회 안에는 천주교를 타자 내지는 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늘 잠재해 있었다. 이는 나중에 흥선대원군이 천주교 박해를 결정하게 되었을 때 박해를 확대시키는 밑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영문 초록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find out social background of the 1866’s persecution(Byeongin-bakhae, 丙寅迫害). This was the most persecution against Catholic in Korea(Joseon, 朝鮮). However researches on cause of this persecution have leaned to political aspect. This article will observe the social aspect. The catholic spreading period of Korea was simliar to the time that the movement of popular religion has flourished. Dong-hak was representation of these movements. This religion was opposed to catholic but was suspected of heresy from the Korean Court. Dong-hak was dissimilared to Catholic. The one pursued reformation of reality, the other hoped the world beyond. The latter did not seek for social renovation but was seperated from real society. For that reason, I think that lay in warning as for Catholic in Korean society. On the one hand there might be that perceived as outsider. And the prohibitory decree against Catholic(Cheoksa-youneum, 斥邪倫音) was available situation. Theory of rejecting western learning(Cheoksaron, 斥邪論) was also lasted. Cheoksaron’s scholars expelled occidental value because they prescribed as currency and lust. They criticized severely western technology too. I suppose that most of Korean people sympathized with or unconcerned about catholic persecution by reason of preceding factor. On the first half of 1860s, Korea suffered popular uprising, organization of Dong-hak and news of Beijing’s surrender. French Missionaries described and estimated about these occurrences in Korea. They also have minded impacts that would reach to Korean Catholic. However they perceived differently the situation of 1865 each other. Bishop Berneux appraised affirmatively an atmosphere of Korean society for Catholic. But other missionaries drew a contrary estimation. At that the time, a persecution was lull in the center but was continued in the region. Then the Court has not revoked a prohibitory decree for Catholic, besides didn’t have to obstruct regional persecutions. There was nothing but a little adjustment when they didn’t have political justification. But it seemed as though the center and the region had been different from each other. Missionaries failed to seize this point well. Persecutions were also connected between 1860 and 1866. These almost were occurred by optional discretion of regional government official. And yet these were possible because Korean society had warning against Catholic. This society has horbored a inclination that recognized Catholic to enemy or outsider. Probably it would became a foundation of persecution’s spread when Heungsun-Daewongun(興宣大院君) decided a catholic persecution.

목차

Ⅰ. 머리말
Ⅱ. 천주교에 대한 조선 사회의 분위기
Ⅲ. 조선 체류 프랑스 선교사들의 상황 인식
Ⅳ. 병인박해 이전의 소규모 박해들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 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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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성(Kim Gyuseong). (2011).병인박해의 사회적 배경에 대한 연구. 누리와 말씀, (29), 8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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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성(Kim Gyuseong). "병인박해의 사회적 배경에 대한 연구." 누리와 말씀, .29(2011): 8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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