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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6.25전쟁에서의 교회의 역할

이용수 308

영문명
발행기관
한국보훈학회
저자명
유영욱
간행물 정보
『한국보훈논총』제9권 제1호, 7~44쪽, 전체 38쪽
주제분류
사회과학 > 사회학
파일형태
PDF
발행일자
2010.06.30
7,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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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문의
논문 표지

국문 초록

6.25전쟁 과정에서학살을 당한 사람들 중에는 일가족이 몰살당한 비극도 있었고, 어린이, 부녀자, 노인 등 남녀노소가 구분이 없었으며 성직자에게는 더욱 심했다. 학살이 방법도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을 하거나 죽창과 대검으로 난자하고 몽둥이로 타살하는 등 온갖 잔혹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6.25가 터지자, 피난길에 오른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았으며, 성직자들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였다. 양떼를 버리고 떠난다는 것이 성직자로서의 도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혹독한 시련을 당해야만 했다. 서울에 남아있던 성직자들은 종교 활동의 보장과 신분 안정을 명분으로‘인민군화영대회’를 주선하고, 공산군에게 협조하겠다는 자술서를 쓰는 굴욕을 감내해야만 했다. 해방 직후부터 활발해진 남북한교회의 정치 참여는 전쟁이 일어난 후 전쟁지원으로 이어졌다. 남한교회의 지자들은 1950년 7월 대전 제일장로교회에서 대한기독교구국회를 결성했다. 대한기독교구구회는 국군이 계속 후퇴하자 그 길을 따라 본부를 대구와 부산으로 옮겨가며 지속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교회가 반공설교를 많이 하는 것은 6.25전쟁 당시 받은 핍박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목회자들의 가장 큰 공적은 반공포로를 분리시켜 적색위험에서 구출해 낸 작업이었다. 이렇게 해서 거제도는 약 17만에 이르는 포로들을 마치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우익과 좌익으로 갈라놓았다. 분리된 반공포로들은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마산, 영천, 인천 등지로 분리시켰으며 이들은 훗날 이박사가 유엔의 허락도 없이 석방시킨 기초를 준 것이다. 또 군목들은 포로로 하여금 신자화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2년에 걸친 교화로 여기서만 5,000명에 이르는 신자가 생겨났다. 신자화 운동은 매일 군목들이 포로들에게 설교 및 강연 또는 사상전향을 벌이 결과였다. 교회의 역할은 정치에 있어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 해방과 국가 재건시기부터 남한과 북한 두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은 현실정치에 깊이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정치활동은 정당을 조직하는 일에서부터 정치적 영향력 행사를 위한 기독교 단체의 결성, 정계 투신 등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끊임없는 신학교육을 통해 공산주의 사상을 민주주의 사상으로 전이시키는데도 역할을 했다.

영문 초록

목차

국문 초록
Ⅰ. 서론
Ⅱ. 6ㆍ25전쟁 발발원인
Ⅲ. 6ㆍ25전쟁에서의 교회의 역할
Ⅳ. 6ㆍ25전시하(戰時下)의 교회활동
Ⅴ. 6ㆍ25전쟁에서 교회의 역할이 남긴 시사점
Ⅵ.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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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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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A

유영욱. (2010).6.25전쟁에서의 교회의 역할. 한국보훈논총, 9 (1), 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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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욱. "6.25전쟁에서의 교회의 역할." 한국보훈논총, 9.1(2010): 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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