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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인(官人)으로서의 김이교(金履喬)

이용수 89

영문명
Kim Yi-Gyo as a government official
발행기관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저자명
임선빈(Yim Seonbin)
간행물 정보
『충청학과 충청문화』제31권, 37~64쪽, 전체 28쪽
주제분류
인문학 > 역사학
파일형태
PDF
발행일자
2021.12.30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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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문의
논문 표지

국문 초록

본고는 조선후기 정조와 순조조에 40여년간 관직에 있었으며, 1811년 신미통신사행의 정사로 일본 대마도에 다녀온 김이교의 관직 생활에 대해 살핀 글이다. 김이교는 신안통김씨인 선원 김상용의 7세손으로 대조인 김광현부터 충청도 홍주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그의 집안은 충청도 내포지역과 서울이 주된 근거지였다. 노론 시파에 해당하는 김이교 집안은 노론 벽파의 정순왕후 가문인 경주김씨와 심한 갈등이 있었으며, 김이교의 관직생활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정조조에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나아간 김이교는 일찍이 정조로부터 제술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전임사관과 사간원·홍문관 경연 등의 청요직으로 근무하면서 실무를 익히고, 외직 경험도 쌓았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하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5년간 유배 생활과 향리로 방축(放逐)되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정순왕후 사후 노론 시파 정권으로 바뀌자, 김이교는 1806년에 43세의 나이로 다시 서용되었다. 이후 승정원 승지, 호조참의, 강원도관찰사, 병조참지,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부제학 등의 당상관직을 두루 거치고, 1811년에는 신미통신사행의 정사가 되어 일본의 대마도에 다녀왔다. 4개월에 걸친 일본 견문은 이후 김이교의 관직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김이교는 통신사행을 수행한 포상으로 종2품인 가선대부에 가자되었으며, 이후 호조참판, 사역원제조, 평안감사 등에 제수된 것도 신사행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50대 이후의 김이교 관직은 사헌부 대사헌, 승정원 도승지, 홍문관부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 한성부 판윤, 공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수원유수 등 중앙 주요부서의 장관직과 의정부의 좌.우 참찬 등을 두루 지냈으며, 외직으로는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런데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63세부터 문형(文衡)으로 일컬어 지는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임한 실이다. 제술 능력이 뛰어났던 김이교는 수시로 효의왕후 행장, 순조의 반교문, 중궁전 옥책문 등을 제술함으로써 가자(加資)를 비롯한 포상을 여러 차례 받았다. 68세에 의정부 우의정에 오른 김이교는 69세로 타계하기 직전까지 국정 운영에 헌신했으며, 마지막 반년간은 영의정과 좌의정이 공석인 상황에서 혼자 국정을 도맡아 수행했다. 사후 김이교는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순조 묘정에도 배향되었다.

영문 초록

목차

1. 머리말
2. 김이교의 가계
3. 입사와 청요직 사환
4. 당상관직 제수와 통신정사 활동
5. 재상직 수행과 순조 묘정 배향
6.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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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A

임선빈(Yim Seonbin). (2021).관인(官人)으로서의 김이교(金履喬). 충청학과 충청문화, 31 , 37-64

MLA

임선빈(Yim Seonbin). "관인(官人)으로서의 김이교(金履喬)." 충청학과 충청문화, 31.(2021): 3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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