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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나(梁漢拿 1893-1976)의 삶과 활동에 관한 一考察

이용수 402

영문명
발행기관
신라대학교 여성문제연구소
저자명
이송희
간행물 정보
『젠더와 사회』여성연구논집 제13집, 5~37쪽, 전체 33쪽
주제분류
사회과학 > 여성학
파일형태
PDF
발행일자
2002.04.01
6,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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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문의
논문 표지

국문 초록

본고는 근현대 부산지역의 여성사와 여성운동을 조명하고 복원해 보고 자 하는 일 의도에서,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였던 양한나(1893~1976)의 삶의 행적을 하나 하나 밝히고 활동을 통하여 그 역사적 위상을 정립해 보고자 시도한 것이다. 2장에서는 삶과 활동의 기반을 조성해 주었던 양한나의 성장과 교육에 관하여 정 리하였다. 양한나는 동래 복천동에서 1893년 교육열이 강한 기독의 1남 10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대담하고 과격한 편이었던 그녀는 서울의 진명여학교에 잠시 다니기도 하였고 일신여차교 고등과에서 공부하여 그 1회 졸업생이 되었다. 기독교학교였던 일신여학교의 교육은 그녀에게 많은 것을 안겨 주었다. 양한나는 일생 동안 여성과 사회를 위해 일하게 되는 기본적 틀을 여기에서 얻게 되었다. 집안의 분위기도 역시 기독교적인 신 앙심이 강한 분위기였다. 때문에 그녀 일생을 좌우하였던 기독교 정신은 성장기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한편 아버지의 교육열과 사회적 활동에 대한 됫받침은 그녀가 동 시대 여성들과는 달리 활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되었다. 3장에서는 양한나의 일제한 민족운동과 여성운동에서의 활동상을 고찰 하여 보았다. 양한나는 일신학교 졸업 후 마산의 의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민족의식을 고양시키는 데 주력하였고 대정의 즉위기념 떡 사건으로 요주 의 인물이 되었다.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하마 여자신학대학에서 공부한 양 한나는 여기에서도 영친왕 결흔반대거사 모의에 가담하였으며, 3 · 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밀항하여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이 때 도산 안창호를 만나게 되었고, 그녀의 호적명 양귀념 대신 양한나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 다. 그 후 독립운동의 자금을 모집하는 일을 맡았다. 그녀의 민족의식은 투철하였고, 언제나 몸을 사리지 않고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 한편 국내에 들어온 양한나는 부산지역 여성들을 계몽시키고자 부산여자청년회를 설립하여 야학설립과 운영에 주력하였고, 토론회와 강연 회를 개최하여 여성들의 의식을 깨우치는 데 앞장섰다. 중국과 조선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던 그녀는 체포되기도 하였으며, 일경의 꿉임없는 감시와 학대를 받기도 하였다. 1923년 한 때 일신여학교 기독교청년회의 총무를 맡았으며, 이화여전 유치사범과에 입학하여 1925년 예과를 졸업하고, 이화유치원 보육교사로 활 동하다가, 1926년 오스트레일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귀국하여 1928년 부산여자기독교청년회 하기수양단을 조직하였다. 당시 여성운동의 방향 은 근우회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계열과 기독교 민족주의 계열이 하나가 되어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양한나는 이와는 달리 여전히 기독교 민족주의계열에서 여성계몽사업에만 주력하였다. 특히 유학 이후 자신의 활동을 보육사업으로 한정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초량에서 삼일유 치원을, 통영에서 진명유치원을 운영하였다. 제4장에서는 양한나의 해방 후 여성운동과 사회운동에서의 활동상을 고찰하였다. 당시 해방공간에서 여성운동은 건국부녀동맹이 깨어진 후, 좌익계열은 조선부녀총동맹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우익계열은 국민당을 결성하고 한편 식민지하 송죽회와 조선애국부인회 계승을 자처한 한국애국부인회를 결성하고 이승만 ·김구 노선을 지지하였다. 양한나는 바로 우익노선의 한 국애국부인회의 초대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여성운동의 입장에서 과거 기독교계열의 계몽운동 노선에서 일관되게 활동하여온 것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이후 한국애국부인회가 독립촉성부인단과 통합하여 독립촉성애국부 인회를 결성하였는데 양한나는 이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후 이 단체는 대 한부인회의 변모하였다. 한편 양한나는 장택상의 권유로 미군정하에서 19,0년 초대 수도 여자경 찰서장에 취임하였으며 당시 여성단체들이 전개하고 있었던 공창폐지운동 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양한나는 소외된 여성들에게 크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과격하게 매춘여성들을 다루어 직위해제 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46년 부산여자기독교청년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하였다. 이 역시 양한나의 여성운동의 노선이 기독교 계열의 것임을 확인시켜 준다. 1948년 부산여자기독교청년회를 떠난 이후 양한나는 자매여숙의 운 영에 전념하였다. 원래는 고아원에서 시작하였으나 많은 소외된 여성들, 특 히 여자정신병자들이 많은 것을 보고 이러한 여성들을 위해 자신의 여력을 여기에 다 쏟았다. 마지막으로 양한나의 여성사 속에서의 위상을 정리해 보았다. 양한나의 기본정신은 기독교적 민족주의와 여성주의였음을 알 수 있다 식민지시대 양한나는 민족운동에 투철한 애국심을 갖고저 참여하였다. 그리

영문 초록

목차

1. 머리말
2. 성장과 교육 - 삶과 활동의 기반 조성
3. 일제하 민족운동과 여성운동
4. 해방 후 여성운동과 사회운동
5.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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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 (2002).양한나(梁漢拿 1893-1976)의 삶과 활동에 관한 一考察. 젠더와 사회, 13 , 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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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 "양한나(梁漢拿 1893-1976)의 삶과 활동에 관한 一考察." 젠더와 사회, 13.(2002): 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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