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김석주(金錫冑)의 각건정(角巾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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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문명
- 발행기관
- 태학사
- 저자명
- 김세호
- 간행물 정보
- 『문헌과 해석』통권 제72호, 22~40쪽, 전체 19쪽
- 주제분류
- 인문학 > 문학
- 파일형태
- 발행일자
- 2015.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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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김석주(金錫冑, 1634∼1684)의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사백(斯百), 호는 식암(息庵)이다. 대동법을 주장했던 김육(金堉)의 손자로, 병조판서를지낸 김좌명(金左明)과 신익성(申翊聖)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중부(仲父) 김우명(金佑明)의 딸이 현종(顯宗)의 비로 발탁되어 외척(外戚)의 신분으로 조정에서 활동하였다. 문장에 뛰어나 숙종대 문형을 주관하였는데,
1683년에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남긴 시문이 회자된다.
김석주는 정치적으로 뛰어난 역량을 지닌 인물이었다. 숙종은 재임기간환국(換局) 정치를 통해 정국을 주도하였다. 조정의 관료들은 당파에 따라부침을 겪었다. 때로는 정치적 공격으로 죽음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나김석주는 정쟁의 와류에 휩쓸리지 않은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갑인예송(甲寅禮訟) 때 남인과 결탁하여 서인을 패퇴시켰고, 경신환국(庚申換局) 때에는 다시 서인과 결탁하여 남인을 몰락시켰다. 이로 인해 그는 권모술수의대가로 평가된다.1
김석주는 이러한 권력을 발판 삼아 여러 곳에 화려한 별서를 경영하였다.
서울의 회현방(會賢坊)에 경저(京邸)를 두었고, 김육 이래 세거한 미음(渼陰)에 별장을 경영하였으며, 한강 상류 우천(牛川) 일대에도 전장을 소유하였다. 엄경수(嚴慶遂, 1672∼1718)는 「연강정사기(沿江亭榭記)」에서 “훈척귀신(勳戚貴臣)으로 권세가 한 세상을 움직여 누대가 강산에 두루 펼쳐져 있었다”고 하였다.2 그러나 김석주의 별서를 조명한 연구는 아직 없는
실정이다.
김석주는 한강 미음 일대에 각건정(角巾亭)을 경영하였다. 각건정의 존재에 대해서는 선행연구에서 간략하게 소개된 바 있다.3 김석주는 차자를올려 장기 휴가를 청해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또한 이때 지은 시문을 모아 ‘각건당록’이란 이름으로 정리하였다.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시문에 출중한 면모를 돌아볼 때, 단순한 하나의 정자로 치부하기에는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각건정에 깃든 역사를 돌아볼 이유가 충분하다.
영문 초록
목차
정치적 공방과 각건정의 건립
김석주의 각건정
김석주 사후 김창협과 각건정
결론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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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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