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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春秋大義와 禮訟의 기억 - 宋時烈과 魏伯珪

이용수 98

영문명
Synaptic Memories : Song Si-Yeol and Wie Baek-Gyu
발행기관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저자명
오항녕(Oh Hang-nyeong)
간행물 정보
『태동고전연구』제27집, 1~30쪽, 전체 30쪽
주제분류
인문학 > 문학
파일형태
PDF
발행일자
2011.06.30
6,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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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문의
논문 표지

국문 초록

본고에서는 장흥의 선비 존재 위백규의 〈기해의례변〉과 〈춘추대의변〉 을 중심으로 기해예송과 송시열의 춘추대의를 둘러싼 논의를 위백규가 그 사실을 어떻게 이해했고 기억했는지 살펴보았다. 위백규는 병계( 溪) 윤봉구( 九 1681년~1767년)의 제자였다. 윤봉구는 송시열의 제자인 수암( ) 권상하(權 1641~1721)의 제자였으므로, 스스로 후미진 장흥 땅에 살고 있다고 했지만 위백규 역시 당색으로 보면 노론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이런 학맥 때문인지 위백규는 기해예송에서 기년설을 타당하다고 보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기년설은 현실적으로 장자가 설 때마다 삼년상을 반복할수 없다는 종법에 대한 실용주의적 해석에 기반하고 있었다. 위백규가 보기에 효종의 정통성 문제는 복제논쟁의 핵심이 아니었다. 오히려 효종의 정통성을 복제논쟁을 통해 확증할 뿐이었다. 이런 그의 관점은 왕가와 사가에 공히 적용 되는 보편주의 종법관으로 귀결되었다. 춘추대의에 대한 논의는 송시열에 대한 세간의 의혹, 즉 송시열의 춘추대 의, 북벌대의의 진정성에 대한 의혹을 ‘손님의 질문’이라는 형식으로 제기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런 질문은 당대에도 송시열에 대한 비난과 의혹이 계속되었 음을 보여주는데, 그 배경에는 송시열이 살던 현실과 나중에 만들어진 표상의 괴리, 또 명청 교체와 복수설치의 좌절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나타난 외상이 깔려 있었다. 그 외상은 창조적으로 나타날 수도 파괴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었는데, 위백규는 냉소적인 ‘손님의 질문’을 비생산적인 것으로 판단했고 옳게 보지 않았다. 이런 질문이 나오는 데에는 송시열을 과도하게 숭봉 하는 사람들의 탓도 있지만, 사람에 대한 미움과 춘추대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세태, 즉 무너진 인심에 있다는 것이 위백규의 생각이었다.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고, 대의가 늘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주자도 송나라가 망하는 상황을 알고 있었다. 당시 대부분 조선의 식자들이 그러했듯이 송시 열도 명나라의 멸망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춘추대의에 따르면 명나라가 멸망한 상황에서 조선의 자립성만 남는다. 주자가 살던 송나라는 망했 지만 송시열이 살던 조선은 남아 있으니까. 이 점은 위백규가 만났던 군주 정조의 인식과 궤를 같이 한다. 그래서 위백규는 하늘의 기강과 사람의 윤리를 우주 사이에서 떠받쳐 지탱하면서 만세토록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영문 초록

I studied On Dispute on Ritual of Gi-Hae(1659) and On Great Cause of the Spring and Autumn of Wie Baek-Gyu who lived in Chang-Hung in 18th Century Joseon. Wie was a disciple of Yoon Bong-Ku. Yoon was a member of No-ron that was a political and academic party following Song Si-Yeol as a Master. In this respect, Wie supported the One-year Mourning theory on the ritual of Gi-Hae. His One-year Mourning theory was based on the practical interpretation on the principle of succession that we couldn t do the One-year Mourning everytime when the eldest son stood. According to his idea, the legitimacy of King Hyo-Jong was not the point of the Dispute on Ritual of Gi-Hae, On the contrary, That was the rationalization of the legitimacy of King Hyo-Jong. His view was led to emphasize the equality of Jong-Phup adoption which insisted not only the common family but also the royal family should follow the Jong-Phup. In his On Great Cause of the Spring and Autumn , Wie introduced a suspicion of Song Si-Yeol who was a symbol of Buk-Bul that aimed the reconstruction of self-respect of Jo-Seon against Qing China that invaded Jo-Seon twice and forced the sovereign and subject relation to Jo-seon. The background of this suspicion reflected the estrangement between the contemporary reality of Song and the representation of the future generation, the trauma of the defeat of the war. The trauma might appear as creative power or destructive one. Wie judged the suspicion, the sneer on Song as the non-pregnancy one. Wie considered that this sneer showed the degrade of virtue There was no state without ruin, and the cause were not always realize. Song also knew the defeat of Ming China and accepted the change of the international order. Interestingly, after the defeat of Ming China, according to Chunchu-Daeyi, the independence of Jo-Seon remained. Wie was in accordance with the view of King Jeong-Jo. Wie aimed the persistency of fundamental principle and ethic among Heaven, Earth, and Human.

목차

1. 머리말
2. 己 의 전개와 기억
1) 기해예송의 전개와 쟁점
2) 예송에 대한 견해와 변증
3. 大 의 기억과 변론 1)〈춘추대의변〉의 배경
2) 춘추대의에 대한 견해와 변론
4.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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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녕(Oh Hang-nyeong). (2011).春秋大義와 禮訟의 기억 - 宋時烈과 魏伯珪. 태동고전연구, 27 ,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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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녕(Oh Hang-nyeong). "春秋大義와 禮訟의 기억 - 宋時烈과 魏伯珪." 태동고전연구, 27.(2011):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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